강요주(江瑤柱). 꼬막보다 살조개로 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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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요주(江瑤柱). 꼬막보다 살조개로 보아야

    [도문대작] 46. 달고 부드러웠던 동해의 살조개

    • 입력 2024.10.05 00:03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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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고려 후기 문신 중에 유석(庾碩, ?~1250)이라는 분이 있다. 여러 지역의 안찰사를 지내면서 백성들을 위해 훌륭한 정치를 했을 뿐 아니라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져서 조선 말기까지 두고두고 언급되는 분이다. 당시 대장군이었던 김보정(金寶鼎)과 이보(李輔)가 노비 문제로 송사를 벌이게 되었는데, 유석은 당연히 공명정대하게 처리를 했다. 아마도 두 사람 모두에게 부족한 판결이었던 모양인지, 두 사람의 참소를 입어서 좌천되었다가 얼마 뒤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유석이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副使)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어떤 병마사(兵馬使)가 강요주(江瑤柱)라는 것을 바친다. 이것은 용진현(龍津縣)에서 잡히는 해물(海物)의 이름인데, 잡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용진현 사람 50가구가 강요주를 잡아서 공물로 바치는 것이 힘들어서 도망갔을 정도였다. 워낙 귀한 것이라서 권력이 있는 자들이 백성들을 몰아서 잡은 강요주를 권력자들에게 뇌물로 바쳤으니, 백성들의 고통이야 얼마나 심했겠는가.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유석은 강요주를 공물로 올리는 것을 금지했다. 최고의 권력자였던 최이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유석은 나에게 강요주를 바치지 않으면 될 일이지, 뭐 힘들게 도내의 수령들에게까지 금지 시키는 것이냐?” 이렇게 정치를 했으니 백성들은 칭송했고 권력자들은 싫어했다. 이 일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권16) 1250년(고종37) 7월 기사에 나온다.

     

    “강요주(江瑤柱). 북청(北靑)과 홍원(洪原)에서 많이 난다. 크면서도 달고 부드럽다. 고려 때에는 원(元) 나라의 요구에 따라 모두 바쳐서 국내에서는 거의 먹을 수가 없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강요주(江瑤柱). 북청(北靑)과 홍원(洪原)에서 많이 난다. 크면서도 달고 부드럽다. 고려 때에는 원(元) 나라의 요구에 따라 모두 바쳐서 국내에서는 거의 먹을 수가 없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청백리로서의 유석은 그 명성이 조선 말기까지 꾸준히 전해진다.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유석이 백성들을 위해 강요주를 바치지 말도록 한 조치는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나 역시 이 기사를 읽으면서 ‘강요주’가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사전류의 문헌에서 ‘강요주’를 찾아보면 “살조개 혹은 꼬막”이라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살조개와 꼬막은 다른 품종이다. 생물학적 분류로 치면 살조개는 백합목 백합과에 속하는 조개라면 꼬막은 돌조개목 돌조개과에 속한다. 물론 많은 번역본에서 이 품종을 살조개라고 표기하지만, 꼬막을 지칭하기도 한다는 점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살조개와 꼬막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조선 시대 문헌에 어떤 의미로 표기했는지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강요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강요주(江瑤柱). 북청(北靑)과 홍원(洪原)에서 많이 난다. 크면서도 달고 부드럽다. 고려 때에는 원(元) 나라의 요구에 따라 모두 바쳐서 국내에서는 거의 먹을 수가 없었다.” 허균이 맛본 강요주는 북청과 홍원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이었다. 이곳은 함경남도에 있는 곳으로, 유석이 금지시켰던 강요주가 생산되던 용진현과 가까운 지역이었다. 용진현은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으로 치면 강원도 최북단 함경도에 붙어있는 문천시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이곳은 모두 한반도 북쪽 지역의 동해를 끼고 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꼬막과는 느낌이 좀 다르지 않은가.

     

    허균이 언급한 ‘강요주’는 꼬막보다는 살조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이 언급한 ‘강요주’는 꼬막보다는 살조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다시 살조개와 꼬막 문제로 와보자. 살조개는 우리나라 전 연안에서 발견되지만 주로 모래가 있는 곳에서 살아가며 수심 2m 전후의 깊이에서 발견되므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조개는 아니다. 이에 비해 꼬막은 갯벌 지역에서 주로 잡히기 때문에 살조개만큼 구하기 어렵다고 볼 수는 없다. 유석이 다스리던 지역도 한반도 동북쪽 해안을 끼고 있는 곳인데 다 구하기 어려운 조개를 백성들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공물로 바치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게다가 조선 후기 문인인 김려(金鑢, 1766~1822) 역시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담정유고 권8)에서 북관(北關) 지역의 특산물 ‘강요주’에 대해 기록을 남긴 바 있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許浚, 1539~1615)을 인용하면서 강요주는 조개 종류이며 껍데기(패각)에 아주 미세한 줄이 가 있고 색깔은 희다고 하였다. 식초를 쳐서 구워 먹으면 부인병에 효과가 있다고 덧붙였다. 비슷한 시기의 문인인 심상규(沈象奎, 1766~1838) 역시 강요주가 홍원 지역의 바다에서 생산된다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이런 기록들의 맥락을 감안할 때 허균이 언급한 ‘강요주’는 꼬막보다는 살조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강요주를 꼬막이라고 번역한 사람들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이것이 꼬막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 성종 때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김여석(金礪石, 1445~1493)이 강요주 100개를 바쳐서 비난을 받은 바 있는데, 실록의 해설에 의하면 강요주는 비인(庇仁)이나 내포(內浦) 등지에서 잡히며 조수가 빠져나가면 진흙이 드러나는 곳에서 구한다고 하였다. 이 설명을 보면 꼬막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강요주와 관련된 기록은 대부분 한반도 동북 지역의 바다에서 나온다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 점에서 강요주는 살조개를 지칭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동해 바닷가 시골에서 자란 내게 조개는 주로 탕으로 끓여 먹거나 삶은 조갯살을 국수의 고명으로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모래벌판을 열심히 훑어서 조개를 한 보따리 잡아서 집으로 온 날은 어머니가 난감하게 웃으면서 국수를 끓이시던 모습도 생각난다. 훗날 나이가 들어서 전라도 남쪽을 여행하다가 만난 꼬막 정식과 같은 화려한 조개 요리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기록은 부족하지만, 허균은 어떤 방식으로 살조개를 먹었기에 북청과 홍원 지역에서 잡은 조개가 맛있다고 했을까? 허준이 말한 것처럼 식초를 살짝 둘러서 구운 조개였을까 아니면 시원하게 끓여낸 조개탕이었을까. 워낙 귀하다고 했으니 그것으로 조개젓을 담그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방식으로 조개를 즐겼든 허균은 유배 생활을 하던 인근 바닷가의 조개를 맛보면서 예전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렸을 것도 같다. 모든 음식에는 내 삶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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