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시냇가의 금린어를 상상하는 즐거움
  • 스크롤 이동 상태바

    봄날 시냇가의 금린어를 상상하는 즐거움

    [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⑬금린어(錦鱗魚 ·쏘가리)

    • 입력 2024.02.17 00:03
    • 수정 2024.02.20 00:14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풍기 강원대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강원도 춘천부에 사는 동몽교관(童蒙敎官) 정광형(鄭光衡)은 모시고 살던 부친과 동시에 역병에 걸린다. 병석에서 신음하던 와중에 부친이 금린어(錦鱗魚)를 먹고 싶어 하자 정광형은 아픈 몸을 이끌고 강으로 간다. 금린어를 잡으러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미끄러운 돌 때문에 넘어져서 무릎을 다친다. 그렇게 몸을 다쳐가면서까지 끝내 물고기를 구해서 부친에게 올렸다고 한다. 나중에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무릎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다시 무릎을 다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같은 마을에 사는 유생 최성해는 이 소식을 듣고 임금에게 글을 올려서 정광형에게 정문(旌門)을 내려서 상을 내려 주십사 하는 요청을 한다. 최성해(崔星海)는 춘천 서면 지역에 근거를 두고 세거했던 수성최씨(隋城崔氏) 집안 인물로 자세한 이력을 알 수는 없지만, 춘천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상소 덕분에 춘천의 효자 정광형이 기록에 남게 되었다. 순조 16년(1816) 8월 26일자 ‘일성록(日省錄)’에 나오는 내용이다.

     

    춘천 소양강 '쏘가리 상' 사진=MS투데이 DB
    춘천 소양강 '쏘가리 상' 사진=MS투데이 DB

    금린어는 쏘가리를 의미한다. 쏘가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는 물고기다. 등에는 가시가 있어서 위험을 느끼면 가시를 세워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흔히 발견되었지만, 이제는 생태 환경의 변화 때문에 잡히는 개체 수가 매우 적어졌다. 이 때문에 쏘가리는 제법 비싼 매운탕 재료로 알려져 있다. 입도 큰 편이고 등에 가시가 달린 지느러미가 길게 나 있어서 얼핏 보면 사납게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맛이 워낙 좋아서 오랜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즐겨 먹었던 식재료인 것은 분명하다. 조선 전기 사정을 기록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쏘가리는 전국에서 널리 잡히는 토산품이었는데, 강원도에서도 원주, 춘천, 정선, 영월, 평창, 인제, 홍천, 회양, 철원 등에 해당 지역 토산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쏘가리라는 이름보다는 금린어라는 이름이 과거 기록에 많이 등장한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연시조 작품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첫 번째 수에 등장하는 바람에 익숙한 물고기 이름이기도 하다.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계변(濁醪溪邊)에 금린어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읽어보면 금세 기억나는 이 작품은 우리나라 시조 문학사에서 이른 시기의 연시조 작품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조선 시대 선비들이 자연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노닐면서 한가로운 흥취를 노래한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초기작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금린어(쏘가리),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금린어(쏘가리),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어떻든 금린어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식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었다. 허균의 ‘도문대작’은 그러한 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금린어 항목을 이렇게 서술한다. “금린어(錦鱗魚). 산골에는 어디에나 있는데 양근(楊根)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처음 이름은 천자어(天子魚)였는데 동규봉(董圭峯)이 먹고는 맛이 좋아 이름을 물으니 통역관이 얼떨결에 금린어라고 하였는데 모두 좋다고 하여 금린어가 되었다.”
    ‘도문대작’의 기록 중에 설화를 기록한 드문 대목이 바로 금린어 항목이다. 이 기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금린어라는 명칭이 생긴 유래를 허균은 조선 전기 ‘동규봉’으로 가져간다. 동규봉은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을 지칭한다. 규봉은 동월의 호이다. 그는 조선 성종 19년(1488)에 조선으로 왔는데, 온화한 성품과 예(禮)를 잘 지키는 사람이어서 당시 조선 관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가 쓴 ‘조선부(朝鮮賦)’를 통해서 15세기 조선의 풍물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동월이 사신의 임무를 띠고 조선에 왔을 때의 일이라고 했다. 아마도 쏘가리를 대접했던 모양인데 너무 맛이 좋아서 물고기의 이름을 묻는다. 조선에서는 쏘가리라는 이름과 함께 ‘천자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는데, 그 이름에 들어있는 ‘천자(天子)’가 중국 사신에게 말하기에는 너무 조심스러웠다. 민물고기 이름이 감히 ‘천자’라는 말을 붙이다니 이렇게 불경스러울 수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우리말 이름인 ‘쏘가리’는 통역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당황하던 역관(譯官)이 ‘금린어’라고 알려주는 바람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황망한 와중에도 금린어라고 이름을 만든 이유는 물고기의 모습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금린어는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은 비늘을 가진 물고기라는 뜻이다. 쏘가리의 몸통에 알록달록하게 무늬가 있는 걸 보면 그 이름을 얼마나 잘 붙인 것인지 감탄하게 된다.

    허균이 동월이라는 명나라 사신을 등장시켜서 금린어에 대해 서술한 것은 어찌 보면 터무니없는 태도는 아니었다. 동월이 조선에 다녀간 뒤 지은 ‘조선부’는 당시 조선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남기고 있어서 조선 전기의 풍속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귀한 자료다. 바로 이 책에 쏘가리를 언급하고 있다. 동월은 조선의 문물을 열거하면서 물고기로는 금문(錦紋), 이항(飴項), 팔초(八稍) 세 종류를 거론하였다. 그리고는 주석에 ‘금문’이라는 물고기는 궐어(鱖魚, 쏘가리)와 비슷한데 몸이 둥글다고 설명하였다. 허균은 아마도 ‘조선부’를 익히 읽었을 것이고, 여기에 등장하는 금문어의 기억을 해당 설화에 투영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허균의 이 기록은 설화에 불과할 뿐이다. 동월보다 더 오래전인 고려 말에 활동했던 이색(李穡, 1328~1396)의 문집에 이미 금린어라는 명칭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노년에 옛날을 회상하면서 쓴 시가 있는데, 거기에 금린어를 잡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자신의 관향(貫鄕)인 한산(韓山)을 배로 왕래할 때 등불을 켜놓고 술잔을 기울였는데 금린어를 잡아서 안주로 삼았다는 것이다.

    쏘가리와 함께 민물고기를 자아서 매운탕을 끓이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썩하게 한 그릇 즐기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시대가 변하면서 천렵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이 사라졌다. 마을 공동체 개념이 약해지면서 이런 풍습은 날이 갈수록 옅어진다. 시대의 변화로 치부하면 그뿐이겠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種)의 숙명이 아니던가.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살진 쏘가리와 함께 막걸리를 한 잔 기울이는 시냇가를 상상해본다.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저작권자 © MS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56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