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⓵허균이 ‘도문대작’을 지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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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⓵허균이 ‘도문대작’을 지은 사연

    • 입력 2023.11.23 15:05
    • 수정 2023.11.23 15:26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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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도문대작’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허균(許筠, 1569~1618)은 우리에게 '홍길동전'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여러 편의 뛰어난 한문 소설을 쓰기도 했지만, 그가 보여주었던 문화적 사유를 더 주목해야 한다. 누이였던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과 함께 당시 조선 문단의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주기도 한 시인이었고, 뛰어난 비평안으로 좋은 시를 뽑아서 시선집을 편찬하기도 했으며 비평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엄청난 독서광이었던 허균은 과거의 고전뿐만 아니라 동시대 명나라의 선진적인 저술들을 구해서 읽고 자기 사유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의 작업은 조선에만 국한되지 않고 동아시아적 시각 안에서 이루어졌다. 허균은 17세기 조선의 문명이 변화하는 중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우리가 읽어갈 '도문대작(屠門大嚼)'이라는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어떤 연구자는 이 책을 조선의 대표적인 조리서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조리서라기보다는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이라고 보아야 한다. 동서양의 많은 고전이 그러하지만, 이 책은 허균이 고난을 겪고 있던 1611년에 지어졌다.

     

    허균의 '도문대작' 영인본. 사진=김풍기
    허균의 '도문대작' 영인본. 사진=김풍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허균이 과거 시험을 관리하는 시관(試官)으로 발령을 받은 것은 1610년(광해군2) 10월 19일의 일이다. 정시 과거가 아닌 별시(別試)이기는 했지만, 선조의 3년 상을 무사히 마치고 그의 위패를 태묘에 봉안한 것, 세자 책봉, 세자의 입학 및 관례 등 여러 가지 경사가 이어서 발생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열린 시험이었다.

    물론 당시 허균이 별시 문과의 총책임자는 아니었다. 당시 독권관(讀券官)으로는 좌의정이었던 이항복(李恒福)을 필두로 이정귀(李廷龜)와 박승종(朴承宗)이 임명되었고, 대독관(對讀官)으로는 조탁(曺倬), 이이첨(李爾瞻), 홍서봉(洪瑞鳳), 허균(許筠), 이덕형(李德泂)이 임명되었다. 독권관은 일반적으로 임금이 직접 관장하는 시험에서 시험 답안지를 읽고 난 뒤 임금에게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종2품 이상의 관료 중에서 선발되었다. 대독관은 비슷한 역할을 하되 정3품 이하의 관료 중에서 선발하였다. 이 시험에서 허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맞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우선 기억해 두자.

    그런데 1610년 10월 22일 합격자 발표가 된 뒤에 문제가 생겼다. 명단에는 시험 채점에 참여했던 사람과 가까운 인물들이 다수 들어있었다. 오죽하면 이때의 합격자 명단을 ‘자서제질사돈방(子壻弟姪査頓榜)’, 즉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사돈을 위한 명단이라고 불렀겠는가. 뒷사정은 많지만, 허균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는다. 자신의 조카인 허보(許寶), 조카사위 박홍도(朴弘道), 자신의 지인인 변헌(邊獻) 등을 부당하게 합격시켰다는 죄로 유배형을 받는다.

    1610년 12월 29일 한양에서 출발하여 1611년 1월 15일 귀양지였던 충청도 함열(咸悅)에 도착한다. 함열 현감 한회일(韓會一, 1580~1642)과는 친한 사이였지만 귀양바치인 허균을 도와주기는 쉽지 않았다. 여전히 칼바람과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깊은 겨울, 먹을 것 없는 귀양지에서 허균의 고초는 말할 수 없이 컸다.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허균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엄청난 상상력이 있었다. 엄혹한 추위 속에서 그는 가장 행복했던 곳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바로 강릉이었다. 경포 주변을 노닐던 시절이 얼마나 그리웠으랴. 허리가 꼬부라지는 굶주림 속에서 그는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던 때를 떠올렸다. 허균이 현실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가장 멋진 방법은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 상상력을 바탕으로 집필된 책이 바로 '도문대작'이다.

     

    허균의 '도문대작' 영인본. 사진=김풍기
    허균의 '도문대작' 영인본. 사진=김풍기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집이 가난하기는 했지만, 선친께서 생존해 계실 적에는 사방에서 기이한 먹을거리들을 예물로 바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어릴 때 온갖 진귀한 음식을 고루 먹을 수 있었다. 커서는 잘사는 집에 장가들어서 육지와 바다에서 나는 먹을거리들을 다 경험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전쟁을 피해 북쪽으로 갔다가 강릉 외갓집으로 갔다. 그곳은 여러 가지 기이하고 귀한 것들이 많아서 골고루 맛볼 수 있었다. 벼슬길에 나선 뒤로는 공무(公務)로 남북을 오가며 더더욱 입을 호사시켜서 맛난 고기를 맛보고 아름다운 꽃부리를 씹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허균은 이 글에서 먼저 어렸을 때부터 온갖 진귀한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온 이력을 요약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의 굶주림과 대비되어 한층 더 풍성한 느낌을 준다. 음식에 대한 허균의 관심은 상당히 높아서, 자신이 먹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음식이나 음식 재료의 특징을 기억해내고 지역별 생산품을 품평까지 하면서 '도문대작'에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다. 부친이 살아생전 전국 각지에서 선물로 받았던 특산물들, 외갓집이 있던 강릉에서 지내는 동안 맛보았던 진귀한 음식들, 잘사는 처가 덕분에 먹어보았던 맛있는 음식들, 전국 여러 지역으로 출장을 다니면서 먹어보았던 지역의 음식들, 어쩌면 그 음식을 먹을 당시에는 귀한 줄을 몰랐던 것들이 지금 굶주림과 추위로 힘겨운 현실을 닥쳐보니 새삼 떠올랐을 것이다.

    드디어 허균은 기억 속의 음식을 끄집어내서 목록을 만들고 거기에 얽힌 자신의 경험을 간략하게 메모 형식으로 기록한다. 현실에서는 접할 수 없지만, 기억과 상상 속에서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음식 목록을 통해서 우리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 조선의 음식 문화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은 음식 비평서나 조리서가 아니라 음식에 대한 행복했던 기억을 적은 책이며, 자기 인생에서 아름답고 맛있었던 음식의 목록인 셈이다.

     

    김풍기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김풍기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원래 ‘도문대작’이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의미다. 한(漢)의 환담(桓譚)이 지은 신론(新論)에 나오는 말로, 실제는 먹을 수 없는 처지지만 먹는 것을 흉내 냄으로써 스스로 만족을 느끼려는 태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과거의 화려하고 풍성한 식탁이 있었으되 지금은 그 식탁의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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