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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⓹먹감으로 만든 곶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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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⓹먹감으로 만든 곶감

    • 입력 2023.12.23 00:02
    • 수정 2023.12.24 11:15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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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1601년(선조34) 6월, 허균은 당시 사복시(司僕寺)의 낭관(郎官)을 지내고 있던 차에 전운판관(轉運判官)에 제수되어 남쪽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전운판관이란 무엇인가. 지방의 군현에서 세금에 해당하는 공물을 거두어 놓으면 그것을 서울로 옮겨와야 한다. 육로로 그 공물을 실어 나르면 시간도 많이 들고 손실의 염려도 있으므로 많은 경우 배를 통해서 옮긴다. 전국의 사창(社倉)들이 나루를 끼고 그 주변에 분포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어떻든 전운판관은 지방에서 모아놓은 공물을 서울로 옮기는 책임자다. 종5품 정도 되는, 일종의 임시직인 셈이다.

    허균은 그해 7월 8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동작 나루를 건너 남쪽으로 간다. 과천, 온양, 아산, 예산, 홍성, 보령, 남포, 서천, 부안, 고부, 나주, 무장, 고창, 금구 등지를 돌면서 공무를 처리하다가 8월 12일 전주로 들어간다. 8월 13일 진남헌(鎭南軒)으로 나가서 방백과 함께 광대들의 놀이를 관람하면서 하루를 보냈는데, 그날 저녁 대부인(大夫人)이 갑자기 병석에 눕는다. 설익은 감을 먹다가 체한 것이었다. 그들은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밤새도록 동헌에서 결과를 기다렸지만, 이튿날인 14일 아침 결국 세상을 뜨고 만다. 대부인은 누구일까? 단어의 표면적인 의미로만 보면 허균의 모친이다. 허균은 일찍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임진왜란 당시 강릉으로 피난을 하면서 모친을 모시고 간 것을 보면 그가 어머니를 모셨을 것이다. 게다가 전운판관으로 남쪽 지역을 돌아다닌 1601년이면 그의 둘째 형인 허봉(許篈)과 누나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세상을 떠난 때다. 큰형인 허성(許筬)이 살아있었지만, 이복형이었으므로, 허균이 생모를 모셔야 하는 형편이었을 것이다.

    또한, 허균은 대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그곳에 머물러서 상을 치르기로 했고, 16일에는 대렴(大斂)을 마치고 빈소를 마련한다. 17일에는 상주로서 성복(成服)을 했다고 했다. 이 같은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보건대 여기서 나오는 대부인은 허균의 어머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의문을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선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면 벼슬을 그만두고 즉시 상례를 치러야 하지만 허균은 전혀 그러한 제스쳐를 취하지 않았다. 게다가 가족들이 상을 치르기 위해 이곳으로 오지도 않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대부인이 세상을 떠난 다음 날인 15일에는 어릴 적 친구이자 과거 시험 합격 동기생인 강홍립이 왔다면서 아주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17일에는 빈소가 차려진 전주를 떠나서 익산으로 갔으며, 이후 각 지역의 관아에 머물 때마다 기생을 만나거나 주연을 즐기는 모습을 빈번하게 보여준다. 아무리 허균의 성정이 경박하다 한들 자신의 친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런 점에서 여기에 나오는 ‘대부인’의 정체가 과연 허균의 어머니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허균 연구자 중 많은 분이 대체로 허균의 어머니로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료를 꼼꼼하게 다시 검토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여기서 대부인이 허균의 어머니인지 아닌지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이 기록을 읽다가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대부인의 사인(死因)이 바로 감이었다는 사실이다. 대부인은 풋감(早枾)을 먹다가 체해서 결국은 죽음에 이르렀다. 이때가 음력 8월 13일이니 추석 무렵이다. 남쪽이면 감이 붉게 물들어갈 때였을 것이고, 어떤 곳은 이미 홍시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감이 막 생산될 무렵이니 대부인은 아마 그해 처음으로 감을 따서 맛을 본 것은 아닐까. 밤새도록 끙끙 앓다가 결국 세상을 떠난 사건은 허균의 기억에도 꽤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10년이 지나서 허균의 ‘도문대작’이 집필되었다. 흥미롭게도 그 책 안에는 여러 종류의 감이 등장한다.
     
    감 중에서도 먹감이라는 게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품종이 먹감인지 알고 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밭 주변으로 서 있는 감나무 중에 몇 그루는 먹감이었다. 다른 감보다 약간 작았고, 감에는 마치 먹을 듬뿍 묻힌 붓으로 아무렇게나 휘두른 흔적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감이 붉게 물들어 홍시가 되어도 그 검은 흔적은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아마 감을 사러 다니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듯도 싶다. 어떻든 그 검은 흔적 때문에 먹감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터인데, 어른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는지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정말 인기가 높았다. 우선 그 감을 따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며 가며 하나씩 따서 먹으면 참으로 달았다. 지금도 고향 마을을 떠올리면 밭 가장자리에 서 있던 먹감나무가 생각난다.

    허균은 ‘도문대작’에 먹감을 수록하였다. ‘오시(烏枾)’라고 기록한 먹감은 지리산에서 생산되는 것을 최고로 쳤다. 물론 허균의 미각적 기억 속에서의 평가다. 그는 먹감 항목에서 이렇게 적었다. “지리산(智異山)에서 난다. 빛깔은 감색인데 둥글고 끝이 뾰족하다. 맛은 그런대로 좋으나 물기가 적다. 꼬챙이에 꿰어 말려 곶감으로 만들어 먹으면 더욱 좋다.”

    빛깔이 검푸르다는 것은 먹빛 흔적 때문에 멀리서 보면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다른 기록에서는 주로 묵시(墨柿)로 표기된다. 물기가 적어서 홍시를 반으로 쪼개보면 약간 퍽퍽하다 싶을 정도로 살집이 두텁고 쫄깃쫄깃하다. 그래서 먹감으로 만든 곶감이 달고 맛있다. 이런 특징을 포착하여 ‘도문대작’에 수록하고 있다. 지금도 지리산 인근 지역은 대부분 곶감을 지역 특산물로 내세우고 있는데, 그 유래가 짧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먹감으로 만든 곶감은 달고 맛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먹감으로 만든 곶감은 달고 맛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강원도 지역에서는 강릉 인근 지역에서 곶감을 많이 생산했다. 내가 어렸을 때 감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틈을 내서 감을 깎고 꼬챙이에 꿰어 곶감을 만들었다. 집마다 처마 밑에는 붉은 감이 물결을 이루다시피 했다. 요즘처럼 찬바람이 본격적으로 거세지는 때면 긴 겨울밤의 벗으로 곶감이 등장하곤 했다. 물론 곶감 정도면 호사스러운 겨울 간식이기는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때깔이 좋고 단맛이 강한 품종이 좋은 홍시로 대접받고 있다. 상품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기억 속의 홍시는 여러 벗과 고샅길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따먹은 것이 최고다. 너무 익어서 떨어진 것을 주워 먹었던 것이나 더운 여름 햇살을 피해 긴 장대를 들고 무성한 감잎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홍시를 꺾었던 것, 그런 것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홍시로 깊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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