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 순천 ’작설‘이 가장 좋고, 변산의 것이 그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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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茶), 순천 ’작설‘이 가장 좋고, 변산의 것이 그다음이다.”

    [도문대작] 23. 속세와 강호 자연 사이에서 즐기는 작설차의 맛

    • 입력 2024.04.27 00:04
    • 수정 2024.05.03 22:40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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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교수

     꽤 오래전부터 나는 허균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혁명가로서의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허균의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전혀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고, 내 삶을 새삼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던져주곤 했다. 이십여 년 전 나는 허균의 산문을 묶어 번역하고 거기에 내 생각을 써서 ‘누추한 내 방’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낸 적이 있었다. ‘누실명(陋室銘)’(성소부부고 권14)이라는 허균의 글을 표제작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나는 이 글이 지금도 좋다. ‘누실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동아시아의 여러 문인이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허균의 이 글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살아가고 싶었던 이상적인 모습이 이 글 안에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향집에 작은 방이 하나 있고 방에는 책이 가득하다. 쇠코잠방이를 입은 가난한 모습으로 누추하게 살아가지만, 허균은 이곳에 ‘군자가 산다면 누추한 게 무슨 대수냐’(君子居之 何陋之有)고 글을 마무리한다. 

     허균의 ‘누실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차 반 사발 따르고, 향 한 대 피운다. 한가롭게 숨어 살며, 천지와 고금을 살핀다.”(酌茶半甌, 燒香一炷, 偃仰栖遲, 乾坤今古) 얼마나 멋진 삶인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하면서 인생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그 어려운 와중에도 차를 마시고 향을 피워 마음을 깨끗하게 수습하고 고금의 이치를 헤아리며 살아간다. 허균이 귀양살이를 하면서 ‘도문대작’을 쓰는 와중에도 그는 음식 경험을 떠올리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를 가늠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문화적 취향은 분명히 차를 마시며 즐기는 우아한 풍류 쪽으로 한껏 기울어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그의 문화적 취향은 분명히 차를 마시며 즐기는 우아한 풍류 쪽으로 한껏 기울어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도문대작’에서 허균이 차(茶)를 하나의 항목으로 올린 것은 그가 일상생활 속에서 차를 즐겼기 때문에 다양한 차를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차[茶] : 순천(順天)에서 나는 작설(雀舌)이 가장 좋고, 변산(邊山)의 것이 그 다음이다.”

     허균의 문집에는 차를 마시는 내용이 제법 나온다. 물론 차를 만드는 방법이라든지 찻물 우리는 방식에 대한 것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그가 생활 속에서 차를 즐겼다는 점은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주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차를 마시는 행위는 그 자체로 문화적 상징을 지닌다. 차를 우리는 일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세상 번우한 일에서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찻자리가 만들어진다. 허균의 글에 등장하는 찻자리 역시 이런 점을 충분히 반영한다.
    1607년 허균이 공주 목사로 부임했을 때 당시 친하게 지내던 최천건(崔天健, 1538~1617)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구절이 보인다. “적막한 겨울밤, 눈 녹인 물을 부어 올해 새로 덖은 차(茶)를 우려내는데, 불은 활활 타오르고 샘물 맛은 달콤하니, 이 차 맛이야말로 제호(醍醐)나 다름이 없습니다. 공(公)께서 어떻게 이 맛을 알겠습니까?”

     

    허균의 문집에는 차를 마시는 내용이 제법 나온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의 문집에는 차를 마시는 내용이 제법 나온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당시 허균은 부여로 발령을 받고 싶어서 중앙 정부에 근무하고 있던 최천건에게 부탁했지만, 공주 목사로 발령이 난 상태였다. 앞부분에서는 이런 내용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벼슬살이하는 것은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하는 일이니 굶주림과 추위를 면할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는 점을 썼다. 거기에 이어서 위의 대목을 썼는데, 차 마시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맑고 아름다운지를 서술한다. 여기서 차 맛을 비교할 때 언급한 제호는 우유에 갈분(葛粉)을 넣어서 만든 죽으로, 맛있는 음식의 대명사처럼 인용되는 것이다. 한겨울 눈 녹인 물에 새로 덖어낸 햇차를 우려 마시는 밤, 타오르는 불로 따뜻한 방에 물맛도 달콤하다.

     그가 ‘도문대작’을 쓴 것은 이 글들을 쓴 지 2, 3년쯤 지난 뒤의 일이다. 그가 ‘도문대작’에서 두 번째로 꼽은 변산의 녹차는 아마도 이 무렵 본격적으로 맛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곳은 허균이 벼슬살이를 하던 공주와 귀양살이를 하던 함열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귀양살이를 하던 함열과는 더 가까운 지역에 있었으니, ‘도문대작’에서 차를 서술할 때 변산의 차 맛이 저절로 떠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허균에게 최고의 차 맛은 역시 순천에서 생산되는 작설차(雀舌茶)였다. 겨울을 뚫고 돋아나기 시작하는 차나무의 작은 싹을 뜯어서 차로 만드는데, 그 싹의 모습이 마치 참새의 혀와 비슷한 모양이라고 해서 작설차라는 이름이 붙었다. 요즘도 작설차는 우리나라 녹차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가 순천에서 생산되는 작설차를 언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녹차는 남쪽 지역에서 품질 좋은 것이 나온다. 하동이나 구례와 같이 지리산 남쪽에서 생산되는 녹차도 좋지만, 차밭이 멋지게 조성된 곳으로 전라남도 보성이 워낙 유명하다. 이 지역은 모두 순천과 가까워서, 허균이 말한 작설차는 아마도 여기서 생산된 것이었을 터이다.

     

    우리나라 녹차는 남쪽 지역에서 품질 좋은 것이 나온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우리나라 녹차는 남쪽 지역에서 품질 좋은 것이 나온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에게 순천의 작설차 맛은 어떤 계기로 가품(佳品)으로 각인되었을까. 귀양살이를 시작할 때는 한겨울이었으되 ‘도문대작’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는 봄이었다. 엄혹한 겨울을 지내던 어려운 시절은 눈 녹인 물에 끓여내던 녹차의 풍류를 실제로 즐기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후에 엮은 ‘한정록’이라는 책에서 중국 명사들의 글 중에 차와 관련된 좋은 글귀를 많이 뽑아서 수록한 것을 보면 그의 문화적 취향은 분명히 차를 마시며 즐기는 우아한 풍류 쪽으로 한껏 기울어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속세의 부귀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마음으로는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었던 그에게, 속세와 강호자연(江湖自然)의 경계선에서 즐기는 음료가 바로 차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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