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여러 지역 꿀 중 강원 평창에서 나는 석밀(石蜜)이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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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균 “여러 지역 꿀 중 강원 평창에서 나는 석밀(石蜜)이 최고”

    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20. 봉밀(꿀)

    • 입력 2024.04.06 00:02
    • 수정 2024.04.08 23:46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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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한겨울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긴긴밤이면 문득 간식거리가 생각난다. 요즘은 치킨이나 피자를 비롯하여 많은 음식이 있지만, 예전에야 어디 그러했겠는가. 땅에 묻었던 무를 깎아 먹거나 감 껍질과 감말랭이를 꺼내놓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호사스러운 겨울 간식은 무엇이었을까. 가래떡을 화롯불에 굽고 꿀을 한 종지 마련하면 입에는 절로 침이 고였다. 얼마 전 시장에 놀러 갔다가 가래떡을 꼬치처럼 꿰어서 구워주는 걸 보았는데, 어릴 적 맛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맛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간식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구운 가래떡 꼬치를 들고 꿀에 찍어 먹은 일은 어린 시절의 안온함으로 내가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래떡을 화롯불에 굽고 꿀을 한 종지 마련하면 입에는 절로 침이 고였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가래떡을 화롯불에 굽고 꿀을 한 종지 마련하면 입에는 절로 침이 고였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양봉이 보편화하면서 꿀 역시 흔한 음식이 되었다. 옛날에도 부분적으로 양봉 방식의 꿀 생산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근대 이전에는 꿀이 얼마나 귀했겠는가. 규모가 있는 집안이 아니면 꿀을 음식 재료나 간식으로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궁중에서도 꿀을 공물로 받았는데, 산골이라고 해서 좋은 꿀이 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것을 담당하는 지역이 따로 있었다. 허균은 여러 지역의 꿀 중에서 강원도 평창에서 나는 꿀을 최고로 쳤다. ‘도문대작’에서는 꿀 항목을 이렇게 썼다. “봉밀(蜂蜜). 평창의 석밀(石蜜)이 가장 좋고, 곡산(谷山)과 수안(遂安)의 꿀 역시 훌륭하다.”

     봉밀이나 석밀은 모두 꿀을 의미한다. 봉밀은 벌이 생산한 꿀이라는 뜻의 단어이고, 석밀은 바위틈에 있는 벌집에서 채취했다는 뜻에서 이런 단어를 썼다. 좋은 꿀이 생산되기 위해서는 주변에 좋은 꽃들이 많아야 한다. 평창은 사람 발길이 제대로 닿지 않는 깊은 산골이기는 하지만 봄과 여름이면 다양한 꽃들이 수없이 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허균 생존 당시인 1611년 복간되기도 했던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평창군 항목에는 ‘봉밀’이 지역의 토산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정을 보면 평창군의 꿀이 예부터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허균은 꿀을 생산하는 벌의 생활에 감명 깊은 글을 남긴 적이 있다. 1611년(광해군 3) 2월 남궁(南宮) 성을 쓰는 유생에게 보낸 짧은 편지가 문집에 남아있는데, 다음과 같다. “벌통 하나를 오동나무 그늘에 놓고 아침저녁으로 모여드는 걸 살펴봅니다. 벌들의 법도가 무척 엄격하더군요. 그런데 국가의 법도가 벌보다도 못하니, 사람을 실망케 합니다.”
    이 편지를 쓸 때는 그가 함열로 귀양을 가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도문대작’을 집필할 때였다. 유배 원인이 과거시험 시스템 속에서 일어난 부정(不正)이었기 때문에 허균이 벌을 보면서 자연의 법도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국가의 법도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는 없다. 편지를 받는 남궁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맥락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꿀을 모은다는 목표를 위해 일사불란한 질서를 유지하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에서 국가의 법도를 오버랩시킨다는 점을 볼 때 당시 허균이 시대에 대해 깊은 실망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벌보다도 못한 인간이라니, 실망의 정도가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이 간다.

     

    도문대작, '봉밀(蜂蜜). 평창의 석밀(石蜜)이 가장 좋고, 곡산(谷山)과 수안(遂安)의 꿀 역시 훌륭하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도문대작, '봉밀(蜂蜜). 평창의 석밀(石蜜)이 가장 좋고, 곡산(谷山)과 수안(遂安)의 꿀 역시 훌륭하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강원자치도처럼 산수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깊은 산골이 많은 지역에서는 좋은 꿀이 다량 생산되었다. 조선 후기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판소리 작품 중에 ‘춘향가’가 있다. 요즘도 여전히 널리 불리는 대목 중에 춘향이와 이도령이 첫날밤을 지내면서 부르는 사랑가가 있다. 앞부분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니가 무엇을 먹으려느냐, 둥글둥글 수박 웃봉지 떼뜨리고, 강릉 백청을 따르르르르 부어, 씨는 발러 버리고 붉은 점 움푹 떠, 반간진수로 먹으려느냐.”

     여기서 등장하는 백청(白淸)은 희고 맑아서 품질이 좋은 꿀을 지칭한다. 조선 후기에는 강릉의 꿀이 최고의 품질로 인식될 만큼 강원도 지역의 꿀은 높은 성가를 자랑한다. 두 남녀가 밤을 보내는 즐거움을 여러 가지 일에 비유하는 ‘사랑가’에서 가장 먼저 강릉 꿀을 들면서 달콤함을 표현하고 있다. 둥근 수박의 꼭지를 따고 강릉 꿀을 부어서, 씨는 발라서 버리고 붉은 과육을 움푹 떠서 먹는 그 시원함과 달콤함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맛과 같다. 반간진수(半間眞水)는 반쯤 되는 진한 국물이라는 의미로 보아 화채를 지칭한다는 의견도 있고, 반간지술의 변형으로 보아 가늘고 긴 숟가락을 의미한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대목이 의미하는 것은 꿀을 넣어서 만든 수박 화채와 같이 시원하고 달콤한 남녀의 사랑놀이다.

    조선 후기 유학자인 이익(李瀷, 1579~1624)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중국의 여러 주석을 인용하면서 유밀과의 일종인 이들 제수는 꿀이 아니라 엿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언급한다. 이익이 말하는 요지는 명확하다. 세상에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의 경계는 모호하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영원히 더러운 것도 없고 영원히 깨끗한 것도 없다. 이들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으로 변하기도 하고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 깨끗하지 못한 것과 깨끗한 것을 뒤섞어서 벌이 꿀을 만들었지만, 이들이 아름다운 꿀로 변하도록 만들었다면 제사상에 올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허균과 이익의 글을 읽노라면 문득 벌이 대단하다는 감탄이 절로 난다. 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오묘함에 대한 감탄일지도 모르겠다. 벌들 자신이 의식하지 않았겠지만 질서정연한 시스템으로 꿀을 모은다든지, 온갖 재료들을 뒤섞어서 달콤하기 그지없는 꿀로 변화시키는 일은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오묘함을 느끼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쓴맛 뒤의 달콤한 맛은 즐거움이 몇 배가 크다. 시대에 실망하고 국가 시스템에 실망하면서 힘든 유배지 생활을 하고 있던 허균에게 꿀을 상상하는 일은 달콤하기 그지없는 추억이었을까 아니면 아름다운 희망이었을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허균은 유배지 생활에서의 쓰라림과 실망 때문인지 여기서 풀려난 뒤에도 은거의 뜻을 강하게 피력하였다. 이렇게 힘든 시기를 겪었기 때문에 이후의 생활에서 달콤한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 애를 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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