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날 까마귀에게 ‘약밥’을 먹이는 것, 경주의 오래된 풍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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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름날 까마귀에게 ‘약밥’을 먹이는 것, 경주의 오래된 풍습이다”

    [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⑮ 중국 사람의 입맛까지 사로잡았던 약밥

    • 입력 2024.03.02 00:01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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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약밥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찹쌀에 여러 가지를 넣어서 눅진하고 쫀득하게 만드는 이 음식은 정월 대보름에 만들어서 먹는 대표적인 절식(節食)이다. 날씨도 아직은 겨울이어서 옛날 시골에서 약밥을 만들면 서늘한 광에 보관했다가 꺼내서 먹곤 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광에서 꺼내 먹던 약밥은 최고의 간식이었다.

    허균 역시 대보름 무렵이면 약밥을 먹곤 했다. ‘도문대작’에 당연히 하나의 항목으로 꼽히는 것이 약밥이었다. 거기에서 허균은 이렇게 기록했다. “약밥(藥飯). 보름날 까마귀에게 약밥을 먹이는 것은 경주 지역의 오래된 풍습이다. 중국인들이 그것을 좋아해서 본받아 배워서 만들어 먹는데, 고려반(高麗飯)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얼마나 맛있으면 중국 사람들도 조선 사람들의 레시피대로 약밥을 만들어 먹었을까. 중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약밥보다는 고려 사람들의 밥이라는 뜻으로 ‘고려반’이라는 명칭이 익숙했을 것이다. 허균은 약밥이 경주 지역에서 대보름에 까마귀를 위해 만들어 먹이는 풍습으로 기록하였다. 그 시대에는 약밥이 경주 지역에서만 만들어졌던 것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약밥의 유래에 대한 허균 당시의 설화를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면 오래전부터 약밥의 유래를 신라 시대에서 찾으려는 논의가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한 첫 문헌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스님 일연(一然, 1206~1289)이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다.

    신라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재위 기간 479~500) 10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왕이 한번은 천천정(天泉亭)에 행차를 했다. 어디선가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왕에게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라’로 하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 떠돌던 설화를 기반으로 한 것이어서 조금씩 다른 전승을 보이기도 한다. 어떤 전승에서는 신라 제53대 왕 신덕왕(神德王, 재위 기간 912~916)이 흥륜사(興輪寺)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 길에, 꼬리를 서로 물고 가는 한 떼의 쥐를 보고 돌아와서 점을 치니 ‘내일 가장 먼저 우는 까마귀를 따라가라’고도 한다. 어떻든 인간 세상에서는 만나기 힘든 기이한 상황을 보고 결국 비처왕은 까마귀를 따라가도록 명령을 내린다.

     

    보름날 까마귀에게 약밥을 먹이는 것은 경주 지역의 오래된 풍습이다. 중국인들이 그것을 좋아해서 본받아 배워서 만들어 먹는데, 고려반(高麗飯)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보름날 까마귀에게 약밥을 먹이는 것은 경주 지역의 오래된 풍습이다. 중국인들이 그것을 좋아해서 본받아 배워서 만들어 먹는데, 고려반(高麗飯)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왕의 명령을 받은 사람은 까마귀를 보면서 부지런히 따라가다가 경주 남쪽에 있는 남산의 동쪽 산록에 있는 피촌(避村)에 이르게 되었다. 거기서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걸 구경하다가 까마귀를 놓쳤다. 길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홀연 한 노인이 연못 가운데서 나오더니 글을 넣은 봉투를 바치는 것이었다. 봉투 겉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봉투를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 봉투를 받은 사람은 결국 까마귀를 쫓아가지 못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왕에게 올렸다. 왕은 봉투의 글을 보고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여 뜯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일관(日官)이 나서서 아뢰었다. “여기서 말하는 두 사람은 서민이고, 한 사람은 왕입니다.” 왕은 그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겨서 봉투를 뜯어보았다. 거기에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금갑(射琴匣)’, 거문고를 넣어서 보관하는 갑(匣)을 활로 쏘라는 뜻이었다. 왕은 궁을 뒤져서 거문고 갑을 찾아서 활로 쏘았다. 그러자 그 안에 숨어있던 두 사람이 나왔는데, 바로 궁궐 내전에서 수행하던 승려가 궁주(宮主)와 몰래 간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에서는 해마다 정월 상해일(上亥日)·상자일(上子日)·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히 하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정월 보름을 오기일(烏忌日)로 여겨서 찰밥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또 노인이 나와서 봉투를 전해준 연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옛날 달력은 60간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매년 육십간지(六十干支)로 그해를 표시하기도 하지만, 날짜마다 육십간지를 붙여서 표시하였다. 새해가 시작되어 날짜의 육십간지에 처음으로 해(亥)가 들어가면 상해일, 자(子)가 들어가면 상자일, 오(午)가 들어가면 상오일이 된다.

    조선 전기 문인인 성현(成俔, 1439~1504) 역시 자신의 ‘용재총화(慵齋叢話)’(권2)에 이 일화를 게재한 뒤, 찰 쌀밥 만드는 방법을 간단하게 소개하였다. 찹쌀을 쪄서 밥을 짓고, 곶감·마른 밤·대추·마른 고사리·오족용(烏足茸)을 가늘게 썰어서 맑은 꿀과 맑은 장(醬)을 섞어 다시 찐다. 그다음 다시 잣과 호두를 넣어 만드는데, 그 맛이 매우 좋아 이를 약밥(藥飯)이라 한다. 당시 민간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약밥은 까마귀가 일어나기 전에 먹어야 한다.’고 했다. 아마도 천천정에서 있었던 고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중국 사람의 입맛까지 사로잡았던 약밥.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중국 사람의 입맛까지 사로잡았던 약밥.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이렇게 만드는 찰밥을 어째서 ‘약밥’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우리말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목민심서’에서 음식 이름에 들어있는 ‘약(藥)’이라는 글자의 뜻을 꿀(蜜)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약과(藥果)를 밀과(蜜果)로, 약주(藥酒)를 밀주(密酒)로, 약반(藥飯=약밥)을 밀반(蜜飯)으로 부르는 것이 그 예라고 하였다.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약은 일반적으로 건강을 돕기 위해서 먹거나 병을 낫게 하려고 먹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맛있는 것을 음식에서는 약이라고 일컫는데, 약밥도 그 예로 들 수 있다는 주장을 한 사람이 있다. 노덧물이라는 필명을 쓰는 사람이 ‘한자(閒者)의 사전(辭典)’이라는 제목으로 ‘개벽(開闢)’(1921년 2월 1일 발행)에 글을 썼는데, 거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느 쪽 의견이 맞는지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길이 없다. 그렇지만 많은 논의와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약밥의 유래가 오래 되었다는 것,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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