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도(黃桃). 춘천(春川)과 홍천(洪川)에서 많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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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도(黃桃). 춘천(春川)과 홍천(洪川)에서 많이 난다”

    [도문대작] 34. 현실의 파란만장을 넘는 과일, 복숭아

    • 입력 2024.07.13 00:02
    • 수정 2024.07.15 22:16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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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복숭아를 품종별로 세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황도(黃桃). 춘천(春川)과 홍천(洪川)에서 많이 난다” △“반도(盤桃). 금양(衿陽, 지금의 시흥)과 과천(果川) 두 현(縣)에서 많이 났었는데 지금은 전혀 없다. 내가 어렸을 때 서족(庶族)이 안양에 살았는데 냇가에 많이 심어 따서 보내주었다. 맛이 매우 좋았는데 지금은 구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승도(僧桃), 전주(全州) 일대에서는 모두 승도가 난다. 크고 달다”

     지금과는 자연환경이나 기상 조건이 달라져서 복숭아를 특산으로 하는 지역 역시 달라졌다. 게다가 허균 당시의 지리지를 통해서 지역의 특산품을 살펴볼 때 복숭아를 기록하고 있는 곳 역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이는 허균이 ‘도문대작’에 음식을 기록할 때 주변의 기록을 객관적 자료에 기반해서 서술했다기보다는 개인의 경험에 기대서 서술했기 때문에 보이는 차이일 것이다.

     춘천과 홍천 지역에서 황도가 많이 난다는 기록을 보면서 처음에는 조금 뜨악했다. 요즘이야 이 지역에서 복숭아 과수원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복숭아 과수원을 보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분들에게도 춘천과 홍천 지역 특산물로 복숭아를 떠올리지 못했다. 해방 이후 홍천 지역에 복숭아 과수원이 제법 있었다는 증언을 들었지만, 그것이 지역의 특산물로 외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지만 허균은 이 지역의 황도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홍천에 들렀던 기록은 없지만, 원주에 선산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친이 근무하면서 오래 거처했던 곳이었으니 당연히 인근 지역의 맛있는 과일을 접했을 것이다. 춘천과 홍천의 황도를 먹어본 것은 이런 연유가 있었을 것이고, 맛 또한 깊은 인상을 남겼음에 틀림이 없다.

     

     

    허균 도문대작, 황도(黃桃). 춘천(春川)과 홍천(洪川)에서 많이 난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 도문대작, 황도(黃桃). 춘천(春川)과 홍천(洪川)에서 많이 난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홍도와는 달리 반도와 승도는 털이 없는 계열의 복숭아다. 이전 글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근대 이전 동식물 관련 기록을 해독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당시의 용어가 지금의 용어와 다르다는 점과 함께 기록자가 정확한 명칭을 기록했는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언어 발달사에서 중요한 문제다. 근대 사회의 성립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의 통일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표준어는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표준어가 정해져서 언어가 통일되는 순간 수많은 방언이 사회의 심연으로 사라지는 현상을 자주 목도한다. 허균이 ‘반도’라고 호명했던 복숭아가 어떤 품종을 지칭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근대 이전 기록 중에서 ‘반도’라는 복숭아 이름은 그 용례를 거의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허균이 말하는 반도는 어떤 품종이었을까.

     반도(盤桃)는 요즘도 흔히 볼 수 있는 복숭아 품종은 아니다. 예전 문헌에서 신선과 관련해서 자주 등장하는 반도(蟠桃)는 삼천 년 만에 한 번씩 달린다는 신화 속의 복숭아인 데 비해 허균이 말하는 반도는 쟁반이라는 뜻의 ‘반(盤)’을 사용한다. 쟁반처럼 둥글고 납작한 복숭아를 지칭하는 반도는 현재로서는 열매에 털이 없는 납작한 복숭아를 지칭한다. 이 품종이 허균의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런 형태에 근접하지 않을까 싶다. 일제 강점기 안양은 포도 생산지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수원의 딸기, 부천의 복숭아와 함께 경기삼미(京畿三味)로 꼽혔겠는가. 부천 복숭아의 명성을 생각하면 허균의 서족이 심었다는 안양천변의 복숭아 맛이 이해가 간다. 부천과 안양은 서로 이어진 지역이니 부천의 복숭아처럼 안양에서도 맛있는 복숭아가 생산되는 것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다만 지금은 안양의 반도를 구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고 했다. 그것은 안양에서 복숭아가 생산되지 않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서족이 더는 보내주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힌다.

     허균이 말하는 승도는 지금의 천도복숭아를 지칭한다. 스님의 머리처럼 열매가 털이 없이 맨질맨질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보인다. 전주 일대에서 나는 승도는 크고 달다고 했다. 근대 이전 기록 중에서 승도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허균은 공무 때문에 남쪽으로 가끔 여행했고, 그 과정에서 승도를 맛보았을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승도를 맛보았겠지만 역시 그의 미각적 기억 안에서는 전주의 승도가 크고 맛있었다는 의미다.

     

     

    허균 “시내를 끼고 복숭아나무 1백여 그루가 있어 꽃은 반쯤 떨어졌으며, 비단 같은 물결이 도도하고, 그윽한 꽃과 야생초가 우거져 사랑스러웠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 “시내를 끼고 복숭아나무 1백여 그루가 있어 꽃은 반쯤 떨어졌으며, 비단 같은 물결이 도도하고, 그윽한 꽃과 야생초가 우거져 사랑스러웠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은 젊은 시절 임진왜란을 맞아 강릉으로 피난하러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깊이 다친 마음을 치유하면서 책과 산책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가 자주 들렀던 곳 중에 반곡서원(盤谷書院)이라는 데가 있다. 허균의 장인이 천여 권의 책을 보관하는 서재였는데, 책을 좋아하던 허균에게는 이렇게 멋진 곳이 없었다. 그는 반곡서원 주변의 경관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시내를 끼고 복숭아나무 1백여 그루가 있어 꽃은 반쯤 떨어졌으며, 비단 같은 물결이 도도하고, 그윽한 꽃과 야생초가 우거져 사랑스러웠다.” 왜군의 침략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기를 잃은 허균에게 전쟁의 참화를 벗어나 평온한 일상을 회복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반곡서원이야말로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이상향이었다. 복숭아꽃이 이렇게 만발한 곳이라니, 생각만 해도 무릉도원이 눈앞에 구현된 것 같았을 것이다.

     허균의 삶은 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사를 생각해보면 조선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얼마나 답답함을 느꼈을지, 유학의 범주만을 강요하며 자유로운 생각을 제한하는 사회가 얼마나 고루했을지, 마음속 깊이 응어리가 진 젊은 시절의 아픔을 풀 길이 없어 얼마나 먹먹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보이지 않는 가장 절박한 유배지에서 그는 옛날에 접했던 음식을 떠올리면서 일종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동시켜 본 것이다. 그러니 복숭아의 오랜 문화적 상징과 전통에 기대서 평화로운 삶을 희구하는 자신의 마음을 슬며시 가탁해 보았을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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