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작품에 여러 종류 '복숭아' 등장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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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균, 작품에 여러 종류 '복숭아' 등장 시켜

    [도문대작] 33. 동아시아 문화전통 속에서의 복숭아

    • 입력 2024.07.06 00:01
    • 수정 2024.07.08 22:00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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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동아시아 문화에서 복숭아는 다양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과일나무이기 때문에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에 십상이었던 탓이리라. 허균 역시 자신의 작품에서 여러 차례 복숭아를 등장시켰는데, 그 의미나 이미지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분류해 보면 신선과 관련하여 장수(長壽)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는 경우, 무릉도원이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 삿된 기운을 몰아내는 물건, 봄의 상징 등이 그것이다.

     신선과 관련된 복숭아는 아무래도 반도(蟠桃)에 얽힌 전설 때문일 것이다. 조선 정조 때의 일이다. 규장각(奎章閣)에서 숙직을 서던 관리가 책을 보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하리(下吏)가 오더니 자신의 윗사람이 올 것이라고 아뢰는 것이다. 깜짝 놀라 일어나서 나가보니 작은 쟁반에 궁궐의 복숭아 수십 개가 담겨 있었고 임금의 말씀을 적은 글이 붉은 보자기에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후원의 작은 복숭아가 마침 익었구나. 듣자 하니 신선의 복숭아는 사람을 장수하게 만든다고 한다. 지금 이렇게 복숭아를 하사하는 데에는 각별한 뜻이 담겨 있노라. 복숭아를 담은 소반은 그곳에 남겨두어 규장각의 기념물로 삼도록 하라.” 정조 19년(1795)에 있었던 일로 ‘국조보감(國朝寶鑑)’에 나오는 일화다. 숙직하던 관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뜻밖에 복숭아를 선물로 받은 관리의 감동을 능히 짐작할 만하다.

     

    허균은 자신의 작품에서 여러 차례 복숭아를 등장시켰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은 자신의 작품에서 여러 차례 복숭아를 등장시켰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복숭아 때문에 장수를 누린 사람으로 한무제(漢武帝) 때 활동했던 ‘동박삭(東方朔)’을 빼놓을 수 없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도 등장하는 동방삭은 우스갯소리를 잘했는데, 시대와 왕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내용으로 직언을 하는 신하로 이름이 높다. 그는 이름난 신선이었던 서왕모(西王母)의 잔치에 참여했다가 후원에 심어놓은 반도 복숭아를 세 번이나 훔쳐 먹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복숭아는 삼천 년에 한 번씩 열리는데, 한 번 먹을 때마다 수명이 천 년이나 늘어난다고 했다. 흔히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는 것은 세 차례나 반도를 훔쳐 먹었기 때문에 삼천 년이나 산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허균 역시 이러한 이미지를 활용하여 여러 편의 시문을 지은 바 있는데, 동아시아 문화전통에 충실한 창작 태도라 하겠다.

     허균이 지은 한문 소설 중에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성소부부고·권8)이라는 작품이 있다. 간통을 저지른 아내를 살해하고 남궁두(南宮斗)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추포를 피해서 산속을 떠돌던 그는 신선 술을 익힌 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여곡절 끝에 그의 문하로 들어가 신선 술을 익히게 된다. 스승은 남궁두에게 인간의 음식을 끊어야 한다면서 밥을 서서히 줄여간다. 밥을 완전히 끊은 뒤 마지막으로 먹은 것이 검은콩과 복숭아씨를 갈아서 만든 가루였다. 여기서도 복숭아는 인간에서 신선으로 체질을 변화시키는 마지막 단계에서 일종의 비약(秘藥)처럼 사용된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한편 복숭아에는 무릉도원(武陵桃源) 이미지가 들어있다. 허균은 젊은 시절 임진왜란을 맞아 강릉으로 피난하러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깊이 다친 마음을 치유하면서 책과 산책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가 자주 들렀던 곳 중에 반곡서원(盤谷書院)이라는 데가 있다. 허균의 장인이 천여 권의 책을 보관하는 서재였는데, 책을 좋아하던 허균에게는 이렇게 멋진 곳이 없었다. 그는 반곡서원 주변의 경관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시내를 끼고 복숭아나무 1백여 그루가 있어 꽃은 반쯤 떨어졌으며, 비단 같은 물결이 도도하고, 그윽한 꽃과 야생초가 우거져 사랑스러웠다.” 왜군의 침략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기를 잃은 허균에게 전쟁의 참화를 벗어나 평온한 일상을 회복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반곡서원이야말로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이상향이었다. 복숭아꽃이 이렇게 만발한 곳이라니, 생각만 해도 무릉도원이 눈앞에 구현된 것 같았을 것이다.

     도교의 전통에서 복숭아는 다양하게 등장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궁궐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복숭아는 종교와 예술, 일상생활 등 다방면의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허균의 ‘궁사(宮詞)’라는 연작시를 보면 궁중의 풍속 중에 징과 북을 치면서 도열(桃茢)로 뜰을 쓰는 모습을 묘사한 구절이 나온다. 도열이란 복숭아나무와 갈대 이삭으로 만든 빗자루인데, 집안의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그가 중앙관청에 근무하던 시절 궁궐 안에서 있었던 일이나 사물을 소재로 쓴 작품이 ‘궁사’니 도열로 뜰을 쓰는 모습을 직접 목도했으리라.

     조선 전기 소설 중에 ‘설공찬전(薛公瓚傳)’이라는 작품이 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면서 관료였던 채수(蔡壽, 1449~1515)가 지은 작품인데, 사람들에게 공개되면서 조야(朝野)에 치열한 논쟁거리로 등장한다. 특히 젊은 유학자들이 매우 비판적이어서, 이 작품을 쓴 채수를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비판을 받게 되는 이유가 여러 가지지만, 흥미롭게도 이 작품에서 동쪽으로 난 복숭아나무 가지를 잘라서 굿을 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여기서 복숭아나무로 만든 기물을 이용해서 사람 몸에 깃든 귀신을 쫓아내는 민속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임금부터 이름 없는 민중에 이르기까지 복숭아의 열매와 나무는 인간의 탁한 기운을 몰아내고 잡스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귀한 물건이었다.

     

    역사서에서는 한겨울에 피어난 복숭아꽃에서 나라의 불운을 감지하는 지표로 삼았다. 이와는 반대로 겨울에 피어난 복숭아꽃이 상서로움의 징조로 해석된 예도 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역사서에서는 한겨울에 피어난 복숭아꽃에서 나라의 불운을 감지하는 지표로 삼았다. 이와는 반대로 겨울에 피어난 복숭아꽃이 상서로움의 징조로 해석된 예도 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복숭아라고 해서 늘 멋진 이미지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때에 따라서는 나라와 사회의 불안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삼국사기’나 ‘고려사’ 등과 같은 역사서에서는 한겨울에 피어난 복숭아꽃에서 나라의 불운을 감지하는 지표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상서로움의 징조로 해석된 예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도 스님이 수행처를 찾던 중에 한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활짝 피어있는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복숭아꽃 자체를 터부시하거나 상서롭게 보았다기보다는 봄이 아닌 겨울에 꽃을 피웠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했으니, 어찌 보면 복숭아로서는 사람들의 해석 탓에 뜻밖의 오해를 받았던 셈이다.

     허균은 이러한 문화적 전통 안에서 아름다운 시문을 썼다. ‘도문대작’에서 여러 종류의 복숭아를 기록한 것 역시 이러한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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