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청어 어획량 감소 통해 어지러운 정세 읽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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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균, 청어 어획량 감소 통해 어지러운 정세 읽어냈다.

    [도문대작] 36. 세상이 어지러우니 청어도 귀해지네

    • 입력 2024.07.27 00:00
    • 수정 2024.07.30 19:26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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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허균(許筠, 1569~1618)은 어느 날 금산부사(錦山府使)에게 편지를 한 통 쓴다. 금산의 원님이 허균에게 시를 한 수 지어 달라, 부탁했는데 그것을 넌지시 거절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이 편지의 첫 문장은 이러하다. “여장(汝章)이 죽은 뒤로는 하늘에 맹세컨대 시를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비록 좋은 글귀를 얻는다고 해도 어찌 하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여장’은 허균의 절친한 벗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의 자(字)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으나 변변한 벼슬 하나 한 적 없이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시대를 비판하는 시를 지었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동대문 밖에서 첫날 밤을 묵던 중 폭음을 하다가 죽었다. 이 사건은 허균에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이이첨(李爾瞻, 1560~1623), 유희분(柳希奮, 1564~1623) 등 권력자들은 광해군을 옆에 끼고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고, 지식인들의 언로는 완전히 막혀 있었다. 당시 허균 자신도 전라도 함열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겨우 풀려난 뒤끝이었으니 더더욱 그러했으리라. 권필이 죽은 뒤 비통함을 가득 담아서 허균은 절필 선언을 했다. 그 정도로 허균의 심리적 충격은 컸다.

    편지의 내용도 흥미롭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편지 끝에 짧게 붙어있는 추신이었다. 편지를 마치고 이름을 쓴 뒤, 깜빡 잊었다는 듯 무심하게 써놓은 여덟 글자다. ‘이편청어 심하궤세(二編靑魚 深荷饋歲)’라는 말, 즉 청어 두 두름은 연말 선물로 잘 받았다는 뜻의 글이었다. 이로 보건대 이 편지는 권필이 죽은 1612년 이후 어느 해 겨울 금산부사가 허균에게 시 한 편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청어 두 두름을 함께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이듬해 정월 허균이 넌지시 거절하면서 이 편지를 보냈는데, 보내온 청어에 대해 아주 무심한 어투로 말미에 덧붙인 것이다.

     

    청어는 회로도 먹고 구이로도 먹고 과매기처럼 말려서도 먹고 탕으로도 먹는, 그야말로 전천후 식재료였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청어는 회로도 먹고 구이로도 먹고 과매기처럼 말려서도 먹고 탕으로도 먹는, 그야말로 전천후 식재료였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청어는 우리나라 모든 해안에서 잡히는 어종이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각 지역의 토산물을 확인해보면 강원도를 제외한 모든 해안에서 청어가 잡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가 빠진 것은 아마도 이 지역이 어업보다는 농업을 주력 분야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사정이야 어떻든 겨울에 주로 잡히는 청어는 회로도 먹고 구이로도 먹고 과매기처럼 말려서도 먹고 탕으로도 먹는, 그야말로 전천후 식재료였다. 청어가 많이 잡힐 때면 알곡과 바꿔서 식량을 마련할 정도였다. 이순신이 청어 7000마리를 가지고 양식으로 바꾸려 했던 기록을 보건대 근대 이전 청어의 쓰임새는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 이후 청어 관련 기록을 보면 어획량의 기복이 상당히 크다. 1930년대 후반에는 7만톤 전후로 잡히다가 1990년대에는 1만톤 정도로 줄었으며, 근래 다시 어획량이 조금씩 늘고 있다. 이런 사정은 조선 시대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다.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 고종 9년(1872) 12월 12일조의 기록에 의하면, 날씨가 따뜻해지는 바람에 청어가 잡히지 않아서 진상하려는 물량을 맞추지 못한 죄를 받겠다는 문서에 대해 왕이 그를 처벌하지 말도록 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허균도 자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명종 이전까지만 해도 많이 잡히던 청어가 요즘은 잡히지 않는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만큼 청어는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어획량에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여러 종류의 청어를 맛보던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청어의 어획량이 대폭 감소한 것을 통해 나라의 어지러운 정세를 읽어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여러 종류의 청어를 맛보던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청어의 어획량이 대폭 감소한 것을 통해 나라의 어지러운 정세를 읽어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청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청어(靑魚). 네 종류가 있다. 북도에서 나는 것은 크고 배가 희며, 경상도에서 나는 것은 등이 검고 배가 붉다. 호남의 것은 조금 작고 해주(海州)에서 잡히는 것은 2월이 되어야 비로소 나오는데 맛이 정말 좋다. 옛날에는 매우 흔했는데, 고려 말에는 쌀 한 되에 40마리밖에 주지 않았으므로 목은 이색 선생이 시를 지어 그 점을 한탄하였다. 이는 세상이 어지럽고 나라가 황폐해지자 모든 물건이 사라지는 바람에 청어도 또한 귀해졌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 명종 이전만 해도 쌀 한 말에 50마리였는데 지금은 전혀 잡히지 않으니 괴이한 일이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인 데다 지금처럼 바다 생선을 잡을 수 있는 선박이나 기술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연근해 해역에서 잡히는 물고기가 아니면 먹을 수 없었다. 겨울이라는 혹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청어는 상당히 많이 잡혔으므로 겨울 음식으로는 좋은 재료였다. 가는 뼈를 발라내기 불편하지만 그래도 두툼한 살집과 담백한 맛 때문에 누구나 좋아하는 생선이었다.

    청어가 귀한 시절에는 어머니 밥상에 청어를 올리지 못해서 모친이 돌아가신 뒤 평생 청어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하는 조선 후기 유학자 박광기(朴光夔, 1708~1761) 같은 사람도 있었다. 반면 청어가 흔했던 시절에는 끼니때마다 밥상에 청어를 올리라고 했던 한용구(韓用龜, 1747~1828) 같은 인물도 있다. 너무 흔해서 하인들이 주로 먹는 생선인데 매번 재상의 밥상에 올리니 하인들의 우두머리가 주인어른 밥상에 올리지 말라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청어’라는 시에서 “바닷배의 청어가 온 성에 가득한데, 살구꽃 봄비 속에 생선 파는 사내의 소리. 구워보니 예년의 맛 그대로인데, 시절 따라 눈이 끌려 각별한 정 생긴다.”(海舶靑魚滿一城, 杏花春雨販夫聲. 炙來不過常年味, 眼逐時新別有情: 완당집 권10)고 노래했다.

    시절에 따라 청어의 어획량은 달랐지만, 청어 굽는 냄새는 사람의 입맛을 돋우었을 것이다. 여러 종류의 청어를 맛보던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청어의 어획량이 대폭 감소한 것을 통해 나라의 어지러운 정세를 읽어냈다. 어느 시대나 흔하게 나던 물산이 귀해지면 어려움을 겪는 것은 힘없는 백성이 아니던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허균 역시 시대를 읽고 백성의 삶을 살피는 한 시대의 유생이자 관료였다. 귀양살이하는 신세지만 어쩌면 지금의 신세야말로 백성들의 삶을 날것 그대로 경험하는 기회가 아니었겠는가. 이런 사정이 ‘도문대작’의 이면에 스며있어서, 이 책이 단순히 음식에 관한 책만은 아니었음을 슬며시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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