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전복(大鰒魚) 중 제주도 무혈복(無穴鰒) 귀한 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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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전복(大鰒魚) 중 제주도 무혈복(無穴鰒) 귀한 대접

    [도문대작] 48. 푸른 바다 스며있는 전복

    • 입력 2024.10.19 00:05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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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허균의 시대에는 전복이 귀한 식재료였다. 전복을 즐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채취하자마자 회로 먹거나 그것을 즉시 조리해서 먹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 물산의 유통은 원활하지 않았으므로 식재료가 운송되는 도중에 상하기에 십상이었다. 전복 역시 해변에서 한양까지 오는 동안 당연히 상했기 때문에, 조선 시대의 전복은 주로 말린 것 즉 건복(乾鰒)이 유통되었다. 전복은 제주도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해안 지역에서는 널리 잡히는 것이었으므로, 허균이 실제로 어디서 전복을 접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조선 중기 문인 허목(許穆, 1595~1682)은 삼척 부사로 근무하는 동안 지역의 물산을 기록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양야산(陽野山) 바닷가에서 나는 전복이 좋다고 하였다. 강릉 지역에서 오래 머무르기도 했고, 며칠일망정 삼척 부사를 지내기도 한 허균 역시 동해안의 전복을 맛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그는 ‘도문대작’에서 이렇게 썼다. “큰전복(大鰒魚). 제주에서 나는 것이 가장 크다. 맛은 작은 것보다는 못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매우 귀히 여긴다.”

    이 문장은 해석하기에 따라 약간의 의견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일단 허균은 제주에서 나는 전복이 가장 크다고 했다. 제주산 큰 전복은 그것보다 작은 전복보다 맛은 덜하다고 썼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맛있는 작은 전복이라는 뜻인지 제주산 큰 전복이라는 뜻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전복 자체라는 뜻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어떻든 허균은 전복이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들에게도 널리 귀한 대접을 받는 식재료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전복은 크기에 따라 대복(大鰒)과 중복(中鰒)으로 구분한다. 제주도에서 주로 생산되는 것은 큰 전복이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전복은 크기에 따라 대복(大鰒)과 중복(中鰒)으로 구분한다. 제주도에서 주로 생산되는 것은 큰 전복이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전복은 크기에 따라 대복(大鰒)과 중복(中鰒)으로 구분한다. 제주도에서 주로 생산되는 것은 큰 전복이고, 중복 중에서 맛있는 것으로 치는 것은 울산에서 채취되는 조자복(照字鰒)이었다. 허균이 말하는 큰 전복(大鰒魚)은 당연히 제주도에서 잡히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귀한 취급을 받는 것은 제주도의 무혈복(無穴鰒)이었다. 전복은 주둥이로 받아들인 바닷물을 출수공(出水孔)을 통해서 내보내기 때문에 껍데기를 살펴보면 몇 개의 구멍이 있다. 무혈복은 그 구멍이 없는 전복이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글에 보면 무혈복과 조자복을 공물로 준비하느라고 백성들이 고생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 후기의 사정을 통해서 추정해 보자면, 제주도에서 큰 전복을 잡아서 궁궐로 올렸는데 허균은 그것을 맛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강릉과 삼척의 전복과 비교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복은 1970년대부터 양식을 했기 때문에 지금은 그리 귀한 식재료는 아니다. 그렇지만 바다에서 채취하는 것이 전부였던 조선 시대에는 전복을 구하는 일이 어려웠다. 그래서 해안 지역에서는 손님들이 찾아오면 전복을 회의 형태로 상에 올리곤 했다. 이런 풍습은 일본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조선 후기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문인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은 대마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접대하는 모습을 ‘문견별록(聞見別錄)’에 기록하였다. 거기서 많은 음식을 상에 올렸다고 하면서, 처음으로 내놓은 나무상에는 “가늘게 썬 전복을 담아서 내오고, 다음에는 금칠한 채색 상에다 6~7개의 그릇을 놓고 가늘게 썬 어육(魚肉) 등의 반찬을 정갈하게 배열하며, 또 물새를 그 털과 깃을 둔 채로 두 날개를 펴서 말리고, 조개·소라·가재·방게 등은 그 껍질을 벗기지 않고 삶아서 모두 그 위에 올려놓았다”고 했다. 대마도에서 채취되는 다양한 어류 및 패각류를 어떻게 먹는지 잘 보여준다.

     

     

    큰전복(大鰒魚). 제주에서 나는 것이 가장 크다. 맛은 작은 것보다는 못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매우 귀히 여긴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큰전복(大鰒魚). 제주에서 나는 것이 가장 크다. 맛은 작은 것보다는 못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매우 귀히 여긴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이처럼 전복이 귀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제법 있었다. 경상도 수군통제사로 가 있던 김시성(金是聲, 1602~1676)이 현종 5년인 1664년 11월쯤 당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 1619~1675)에게 전복을 선물로 보냈다. 김우명은 현종의 장인이 아니던가. 게다가 김시성의 근무 역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김우명은 김시성이 선물로 바친 전복이 좋았던지 이것을 임금에게 바쳤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김시성의 후임으로 통제사로 발령을 받은 정부현(鄭傅賢) 역시 전복을 선물로 보내게 되면서 하나의 관행처럼 답습이 되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그들이 바친 전복은 ‘생전복’이었으니, 전복이 상하지 않게 하려고 처리를 특별히 꼼꼼하게 했음은 물론 엄청난 속도로 한양까지 보냈을 것이 자명하다. 그 과정에서 김시성이 당시 노론의 실권자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상의했다는 말이 있어서 그가 소명까지 하였으니, 전복 선물이 정치적 문제로까지 비화한 것이다. 물론 김시성이 파직당하는 선에서 마무리는 되지만, 작은 선물이 때에 따라서는 큰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1781년 3월, 전라도 영암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이학년(李鶴年)이 전복을 팔지 않았다는 이유로 천갓동(千㖙同)과 시비가 벌어졌다. 두 사람은 이미 술을 얼큰하게 마신 상태였다. 시비가 벌어지자 두 사람은 싸우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학년이 천갓동을 때렸다. 천갓동이 넘어지면서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서 18일 만에 사망한 것이었다. 소송을 심리한 끝에 이학년을 유배형에 처하면서 사건은 정리되었지만, 이 역시 전복을 두고 일어난 사건인 셈이다.

    이처럼 조선 시대 전복은 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귀한 식재료로 인식되었다. 그러다 보니 제사상에 올리는 예도 있었다. 홍대용의 글에 보면, 그가 중국에 갔을 때 사귀었던 청나라의 선비 엄성(嚴誠)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받고 제사를 올린 제문이 있다. 거기에 보면 향촉(香燭)을 갖추고 전복 10개를 올려서 그를 조문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로서는 정성을 다해서 먼 나라의 벗을 영결(永訣)한 것이다.

    늦게 발견한 전복의 맛이었지만, 이제는 그 매력을 충분히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전복을 손질하다 보면 갑자기 나타나는 영롱한 빛깔의 패각처럼 전복 요리 역시 어느 순간 찬란한 미각을 자극한다. 거기에는 늘 푸른 바다가 깃들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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