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차를 마실 때 편강(片薑) 몇 조각을 곁들이면 차의 풍미가 더욱 풍부해진다. 생강을 얇게 썰어서 끓는 물에 삶은 다음 설탕과 버무려서 졸인다. 그것을 하나씩 떼어서 잘 말리면 맛있는 편강이 된다. 설탕이 주는 달콤함과 생강 특유의 매콤함이 어우러진 편강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으면 바삭한 식감과 특유의 향이 입안에 가득 찬다. 그럴 때 마시는 차 한 잔이야말로 사람의 정신을 맑게 만든다.
생강은 쓰임새가 다양하다. 음식을 조리할 때 향신료나 조미료로 널리 쓰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생강차를 만들어 마셔도 되고 생강 청이나 생강즙, 생강가루 등으로 만들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해도 된다. 갑자기 날씨가 썰렁해져서 감기 기운이라도 들어오면 뜨끈한 생강차 한 잔을 진하게 우려 마시곤 한다.
모든 사람이 생강의 맛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 김치에 들어간 생강 조각이 씹히면 뜻밖의 맛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특히 아이들은 생강 맛을 좋아하기가 쉽지 않다. 어른 중에서도 생강을 딱히 선호하지 않는 분들이 제법 많다. 생강의 맵싸한 맛이 주는 낯선 이미지는 생강과 가까워지는 데에 작은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기호에 따라 선호하는 맛이 다르기는 하지만, 생강은 그 차이가 제법 크다.
옛사람에게 생강은 많은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재로 인식되었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권35)에는 삼보강(三寶薑)이라는 생강을 소개하고 있다. 이 품종은 중국 봉산현(鳳山縣)에서 생산되는 것인데, 명나라 초기에 삼보태감(三寶太監)이 심은 것으로 온갖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조선에서는 오직 전주에서만 삼보강이 생산되는데 중국의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허균이 ‘도문대작’에서 말하는 생강은 삼보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생강을 이렇게 서술한다. “생강(薑). 전주에서 나는 것이 좋고 담양과 창평의 것이 다음이다.”
창평은 현재 전라남도 담양에 포함된 지역이니 같은 곳이라고 본다 해도 허균이 최고로 친 생강은 전주에서 나는 것이었다. 전주 인근 지역은 지금도 생강이 많이 생산될 뿐 아니라 완주군 봉동읍은 우리나라 최초로 생강을 재배한 시배지(始培地)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온갖 생강 관련 음식을 만드는데 오죽하면 생강 짬뽕을 만들 정도겠는가. 이곳이 시배지라는 설에 대해서 나로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거니와 적어도 전주의 생강이 조선 시대에 최고 품질로 각광을 받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허균 이전 시기에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전주의 특산물로 생강을 꼽았으니 조선 시대부터 이 지역의 생강은 이름난 품종이었다.
‘도문대작’을 제외하면 허균의 문집에서는 생강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조선 시대 문인들에게 생강은 좋은 약재로 인식했을 뿐 아니라 평소에서 자주 먹었다. ‘논어’ ‘향당(鄕黨)’편에서 공자가 “생강 먹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不撤薑食)는 구절이 있으므로 의미가 깊은 간식거리이기도 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김뉴(金紐, 1420~?)가 텃밭에 몇 포기 심은 생강을 수확해서 보내온 것에 고마움을 표하면서 약과 차를 만들어 먹으리라는 말을 덧붙였으며, 장유(張維, 1587~1638)는 친구에게 말린 생강을 선물로 받고 나서 풍증(風症)과 위장병, 관절통에 도움을 받았다고 하였다.
흥미롭게도 조선의 왕들이 봄이면 신하들에게 생강 싹을 하사하여 집에 심도록 했던 일이 실록에 자주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생강의 맛이 매워서 흔히 강직한 성품을 가진 사람을 비유하기 때문이었다. ‘송사(宋史)’ ‘안돈복열전(晏敦復列傳)’에 “나는 끝내 내 자신을 위해 나라를 그르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생강과 계피 같은 나의 성품은 늙어갈수록 더욱 매워짐에랴!” 하는 구절에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왕은 신하의 충성스러운 성품을 북돋운다는 의미를 담아 봄에 생강 싹을 하사했다.
정온(鄭蘊, 1569~1641)은 1636년(인조14) 왕이 하사한 생강을 후원에 심으면서 온갖 더러운 것을 씻어내리라 마음먹는 시를 쓴 적이 있다. 조선 후기의 명신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역시 영조(英祖, 1694~1776)에게 음력 2월 그믐날 생강을 하사받고 생강을 ‘쟁신(諍臣)’에 비유하였다. 쟁신은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간언을 하는 신하라는 의미다. 생강의 성질이 소화를 돕고 약의 독성을 중화하는 작용을 함으로써 여러 약재의 효과를 최대한 발현할 수 있도록 하는 점 때문에 그렇게 비유하였다. 임금에게 매서운 간언을 하는 것이 성군으로서의 임금의 재질을 최대한 발현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생강을 하사하는 의미를 명확하게 기록한 왕은 정조(正祖, 1752~1800)다. 정조는 ‘반강명(頒薑銘)’ 즉 생강을 나누어 주는 글이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봄이면 생강 종자를 가까운 신하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예부터 전해 오는 일이다. 강(薑, 생강)이란 강(彊, 굳셈)을 뜻이다. 강하게 막는 힘이 있어서 더럽고 나쁜 것을 제거하고 신령하고 밝은 것을 통하게 한다. 사람에게 오래도록 복용하게 하면 물 들어가는 구습을 벗고 순수한 경지에 오르게 한다.” 그러면서 정조는 생강을 받는 신하에게 단 것을 주지 않고 매운 생강을 주는 의미를 밝혀서 시로 썼다. 굳센 생강처럼 사악한 것을 막을 것이며, 늙을수록 매워지는 생강의 성품처럼 더욱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서 뜻과 기운이 맑고 밝아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도문대작’을 쓸 1611년 당시 허균의 나이는 43세였다. 우여곡절 끝에 유배 생활을 하게 되자 그동안 자기가 쓴 글을 전체적으로 살피면서 훗날 그의 문집이 될 ‘성소부부고’의 초고를 직접 편집하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제는 은거하여 책을 읽는 한편 양생(養生)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된다. 늙을수록 매워지는 생강처럼, 그의 몸과 마음도 단단해져 가리라 마음을 먹는다. 물론 유배가 끝나면서 이 마음은 흩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부안에서의 생활이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 역시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