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1715년(숙종41) 9월, 제주도에 사는 백성 4명이 한양으로 와서 궁궐에 물건을 바치고자 했다. 제주도가 흉작 때문에 백성들이 살기 어려워지자 조정에서는 육지의 곡식을 제주도로 보내서 진휼(賑恤)해 준 적이 있었다. 제주도 백성들은 구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네 사람의 부로(父老)들을 보낸 것인데, 그들 편에 제주도의 토산물인 화복(花鰒)과 인복(引鰒)을 들려서 보낸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온 토산물을 궁궐 주방으로 보내서 임금의 밥상에 올리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해당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담당 관리 입장에서는 그 물건이 어떤 연유로 나온 것인지도 모르고 만드는 과정도 확인이 안 되었으니 임금의 밥상은커녕 궁궐에서 식재료로 사용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당연했다. 상납할 물건을 거절당한 제주도 부로들은 결국 궁궐 앞에 있는 북을 울려서 자신들의 사정을 호소했다. 형조(刑曹)에서 이들을 잡아서 처벌하려고 했으나 왕은 그들을 풀어주도록 했다. 숙종실록에 나오는 기사다.
제주도에서 화복과 인복을 가지고 한양까지 멀고 험한 길을 온 제주도 백성도 대단하지만, 그들이 가져온 식재료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어패류를 비롯하여 어류 종류가 대부분 그러하지만, 유통 과정에서 쉽게 상하곤 한다. 전복 역시 쉽게 상하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말린 상태로 유통된다. 바닷가에서 채취한 전복을 한양까지 올리려면 여러 날이 걸릴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쉽게 손상되곤 했다. 궁궐이나 권력자가 특별히 전복을 채취한 대로 올리라는 명을 내리면 귀한 얼음을 넣어서 보내거나 최대한 유통 기간을 줄이기 위해 역말을 이용해서 밤낮을 달려서 보냈을 것이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말린 전복을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흔히 건복(乾鰒)으로 불리는 말린 전복은 물에 담가놓으면 원래의 전복 상태를 상당 부분 회복한다. 숙종실록에 등장하는 화복과 인복은 모두 말린 전복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 중에 인복은 전복을 채취하여 납작하게 말린 것인데 보통 잡아당겨서 길게 늘려서 만든 것을 말하며, 화복은 말려서 꽃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전복이 귀한 식재료임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그 중에서도 화복은 허균이 따로 언급할 만큼 별도의 식재료로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도문대작’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화복(花鰒). 경상우도(慶尙右道) 해변 사람들은 전복을 채취하면 갈라서 꽃 모양으로 만들어서 상에 올린다. ○ 또 큰 것은 얇은 조각으로 썰어서 만두를 만드는데 이 또한 맛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을 경상좌도라 하고 서쪽을 경상우도라고 한다. 후에 경상남도와 북도로 나누어지지만, 그것이 좌도와 우도에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허균이 맛본 화복은 경상우도의 것이었으니, 굳이 따지자면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서 채취한 전복으로 만들었으리라. 허균의 서술에서는 전복을 따서 화복을 즉시 만드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화복은 건복으로 만든다.
1763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고구마를 들여온 것으로 알려진 조엄(趙曮, 1719~1777)의 ‘해사일기(海槎日記)’(권2)를 보면 비주(肥州)의 수령이 관포(串炮)를 한 궤짝 보내왔다고 했다. 그는 관포가 바로 건복인데, 조선의 화복과 같은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허균이 말하는 화복은 기본적으로 건복에 해당하는데, 그것을 칼로 잘 저미고 새겨서 꽃처럼 만든 뒤에 상에 올리는 것이었다.
조엄 보다 앞 시대에 활동했던 문인인 이경석(李景奭, 1595~1671) 역시 동래부사 원만석(元萬石, 1623~1667)이 화복과 정과(正果)를 보내준 것에 고마움을 표하면서 시를 지은 바 있다. 거기에 보면 “전복은 동해에서 나온 것인데 꽃을 마름질하여 아름답고, 정과는 부상(扶桑)에서 나온 것인데 꿀을 발라 향기롭다.”(鰒從東海裁花美, 果出扶桑帶蜜香)고 표현하였다.
또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이해조(李海朝, 1660~1711) 역시 제주도의 풍속을 기록한 장편 한시에서 “화복은 상에 올라 아름답고, 생선은 음식으로 들어와 신선하다.”(花鰒登盤美, 銀唇入饌鮮)고 하였다. 여기서도 화복은 맛도 좋으려니와 상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 화복을 평범한 백성이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허균은 화복을 서술하면서 동그라미(○)를 이용하여 두 부분으로 구분해 놓았다. 원문에서는 화복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전복 전체에 관련되는 내용으로 보인다. 전복 중에서 큰 것은 얇게 썰어서 만두소로 사용한다고 했다. 물론 전복만을 가지고 만두소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복이 귀한 식재료지만 그것만 넣으면 씹기도 어렵고 만두피와 어울리는 맛을 내기도 어려울뿐더러 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다. 어떤 재료를 섞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다른 것과 혼합해서 만두소를 만들었다고 보아야 한다. 만두에 전복을 넣다니, 귀한 식재료를 호사스럽게 사용하는 것을 보면 ‘도문대작’에 서술할 정도로 허균의 미각을 자극할 만한 식재료가 아닐 수 없다.
큰 범주로 보면 화복 역시 전복에 속하는 것인데 허균은 어째서 전복과 다른 항목으로 분류했을까. 그의 ‘도문대작’에는 이런 경우가 더러 있다. 그 이면에는 음식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가 숨어있다. 하나의 메뉴를 정한다는 것은 그의 사회 문화적 맥락이 작동한다. 메뉴를 통해서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나 문화적 수준을 은밀하게 드러내려는 욕망을 개재시킨다.
허균의 시대에는 전복을 웬만한 양반집에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화복은 보통의 전복보다 조리 과정이 추가되고 미적 감각이 덧붙여지기 때문에 이것을 즐기는 집은 한정적이었다. 그러므로 화복을 즐긴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회 문화적 신분을 상징하는 셈이 된다. 자신은 하찮은 귀양바치지만 문화적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도문대작’의 항목 분류를 통해서 은근히 드러내려는 허균의 욕망을 읽어봄직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