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대어(八帶魚)', 문어(文魚)인데 동해에서 난다. 중국인들이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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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대어(八帶魚)', 문어(文魚)인데 동해에서 난다. 중국인들이 좋아한다.”

    [도문대작] 31. 양반가의 귀한 식재료 문어

    • 입력 2024.06.22 00:02
    • 수정 2024.06.29 00:19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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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한반도 해안 지역이 대부분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강원도 영동 지역을 포함하여 한반도 동해안 지역에서 ‘문어’는 특별한 식재료다. 제사를 지내거나 잔치가 있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문어다. 특별히 간을 하거나 조리를 다양하게 해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문어를 데쳐서 초고추장류와 함께 올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담박하기 그지없는 이 음식은 너무도 슴슴(심심)해서 처음 접하는 사람은 무슨 맛으로 먹나 하는 의문을 가진다. 어릴 적부터 행사 음식으로 등장했던 문어를 만났지만, 문어의 묘미를 알게 된 것은 20대 시절이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어린아이에게는 자극적인 맛이 없으므로 문어 데친 것을 즐기기에는 좀 부족한 점이 있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런 맛에 서서히 물들어가기 때문에 어느 순간 문어의 담박한 맛이 주는 쾌감을 느끼게 된다.
    문어로 할 수 있는 요리는 정말 다양하다. 조림으로 먹기도 하고 탕이나 국으로 먹기도 하며, 말려서 그냥 먹거나 구워서 먹기도 한다. 튀겨 먹기도 하고, 말린 문어를 다양한 문양으로 올려서 음식의 고명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문어는 뼈가 없어서 버릴 곳이 하나도 없는 식재료다.

     문어(文魚)라는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지기는 했지만, 근대 이전의 기록에는 여러 이름이 나타난다. 팔초어(八梢魚), 장어(章魚), 장거어(章擧魚), 망조(望潮)와 함께 팔대어(八帶魚)라는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허균의 ‘도문대작’ 표제어에는 ‘팔대어’로 되어 있고 이것이 문어와 같다고 하였다. “팔대어(八帶魚). 문어(文魚)인데 동해에서 난다. 중국인들이 좋아한다.”
    허균의 기록처럼 문어는 지금도 동해안 지역에서 많이 잡힌다. 조선 전기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동해안 전역과 남해안 일부 지역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문어는 넓은 지역에 분포해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이 소비하는 해산물이었다.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조선의 팔초어가 중국 남쪽 지역인 강절(江浙)에서 말하는 망조인데 맛은 그리 좋지 않다는 내용을 남긴 바 있다. 아울러 ‘책부원귀(冊府元龜)’라는 중국 문헌을 인용하여 당나라 개원 26년(738)에 발해가 마른 문어 100마리를 바쳤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한치윤은 이 기록과 함께 허준(許浚, 1539~1615)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덧붙인다. “(팔초어는) 문어이다. 동해와 북해에서 나는데, 몸체에 여덟 개의 긴 다리가 있으며, 비늘이 없고 뼈도 없다. 이름을 또 팔대어라고도 한다. 또 이와 다른 소팔초어(小八梢魚)라는 한 종류가 있는데, 형체는 팔초어와 비슷하나 작으며, 역시 비늘과 뼈가 없다. 세속에서는 이를 낙지(絡締)라고 하니, 이것이 ‘본초(本草)’에서 말하는 장거어(章擧魚)다.”

     

    문어(文魚)라는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지기는 했지만, 근대 이전의 기록에는 여러 이름이 나타난다. 팔초어(八梢魚), 장어(章魚), 장거어(章擧魚), 망조(望潮)와 함께 팔대어(八帶魚)라는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문어(文魚)라는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지기는 했지만, 근대 이전의 기록에는 여러 이름이 나타난다. 팔초어(八梢魚), 장어(章魚), 장거어(章擧魚), 망조(望潮)와 함께 팔대어(八帶魚)라는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의 기록이 너무 소략해서 글의 이면을 읽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도문대작’에서 허균이 분명하게 말한 것은 두 가지다.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널리 잡힌다는 사실과 중국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허균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강원도 양양부사로 발령을 받아 가게 된 권진(權縉, 1572~1624)에게 써준 송별시에 이런 구절을 넣었다. “철따라 나오는 진미(珍味) 관청 주방에 올리나니, 입 큰 농어 붉은 방어에 팔대어도 있다오.” 게다가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와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은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많은 편지를 남겼는데, 거기에 보면 율곡이 문어 두 마리를 선물로 보낸 기록도 남아있다. 맛있는 음식은 금세 없어진다고 하면서 부끄럽지만, 문어 두 마리를 보낸다는 말이 편지글 속에 들어있다. 또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료 문인이었던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은 강원도 관찰사가 문어를 선물로 보내오자 고맙다고 하면서 시를 써서 보내준다. 거기에는 치아가 없는 늙은 자신에게 ‘진귀한 해물(珍鮮)’인 문어를 보내주어서 그 덕분에 모든 병이 한꺼번에 나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만큼 문어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생문어는 보관하기 불가능했으므로 마른 문어를 준비해서 그들에게 선물로 주곤 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생문어는 보관하기 불가능했으므로 마른 문어를 준비해서 그들에게 선물로 주곤 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그렇다면 중국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허균의 언급은 무엇이었을까? 중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조선의 문어를 좋아했다. 생문어는 보관하기 불가능했으므로 마른 문어를 준비해서 그들에게 선물로 주곤 했다. 세종 5년(1423) 8월 21일자 왕조실록 기사에는 명나라 사신 해수(海壽)가 요구한 물건의 목록이 나온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조선 정부에서는 각 도에 명령을 내려서 해당 물품을 공물로 바치라고 명령한다. 강원도에는 미역, 말린 연어, 말린 송이, 말린 문어가 배당되었다. 역시 강원도 동해안에서 잡히는 문어는 조선에서도 중요한 특산품으로 취급되었다. 이렇게 갑자기 말린 문어를 바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므로 강원도 관아에서는 늘 문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실제로 왕조실록 기사에 보면 중국 사신을 위해서 말린 문어 수백 마리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중국이라고 해서 문어가 없을 리는 없었겠지만, 조선에 파견되어 오는 사신들이 주로 중국 북방 지역 출신들이 많았던 탓에 북경 지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문어를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어렸을 때 행사 음식에 문어가 늘 올라오는 것을 보며 자랐는데, 어른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문어의 이름에 ‘문(文)’이 들어있는 것은 먹물을 몸 안에 간직하고 있으므로 글을 쓰는 이미지가 있고, 이것을 귀하게 여긴 탓에 늘 행사 음식으로 올린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역의 문화 전통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문어라는 이름의 ‘문’은 우리말 ‘믠’에서 온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나무가 자라지 않는 산을 민둥산, 머리카락이 없거나 짧은 머리를 민머리라고 하는데, 그럴 때의 ‘민’과 같은 어원을 가진다. 실제로 19세기의 문인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조선 사람들이 문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유래는 사람의 머리와 같기 때문이라는 어원을 기록한 바가 있다. 문어라는 단어의 어원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더 검토해 보아야겠지만, 이 어종이 예나 지금이나 귀한 식재료로 취급되면서 여전히 식도락가의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나라 음식사의 오랜 전통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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