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때도 차례상은 올렸어”⋯ 100세 어르신의 추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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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때도 차례상은 올렸어”⋯ 100세 어르신의 추석 이야기

    6‧25전쟁 때도 부모님 위한 차례상 올려
    일제강점기, 송편 빚어 일가친척과 담소

    • 입력 2024.09.17 00:05
    • 기자명 최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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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변화와 함께 추석 문화도 급변하고 있다. 일가친척이 모여 성대하게 음식을 차리던 과거와 달리 명절 상을 간소화하거나 가족 여행을 떠나는 등 각기 다른 방식으로 명절을 즐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추석 연휴를 바캉스처럼 즐긴다는 ‘추캉스’나 귀성을 포기하는 이들을 일컫는 ‘귀포자’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다. 

    올해 추석은 지난해 12월 5대 명절의 국가무형문화유산 지정 이후 맞는 첫 추석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문화재청은 명절에 가족과 지역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의 고유성이 녹아있다고 평가했다. 본지는 추석을 맞아 상수(上壽·100세)를 넘긴 지역 어르신들을 만나 추석의 의미와 가치를 짚어봤다. 100번이 넘는 추석을 보낸 이들이 기억하는 명절은 어떤 모습일까. 이들과의 대화에서 시대가 변해도 잊지 말아야 할 명절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안조 어르신은 온의동 자택에서 본인이 지낸 추석 이야기를 전하며 명절의 가치를 이야기했다. (사진=최민준 기자)
    이안조 어르신은 온의동 자택에서 본인이 지낸 추석 이야기를 전하며 명절의 가치를 이야기했다. (사진=최민준 기자)

    “6‧25전쟁 때도 몰래 차례를 지냈어요. 차례는 곧 효도니까요.”

    올해 104세가 된 이안조(온의동) 어르신은 1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명절을 보냈다. 평안남도 강동(현재 평양 강동군)에 살던 어르신은 1‧4후퇴 때 전라남도 목포로 이주했다. 1957년 친형이 살고 있는 춘천으로 건너와 삼천동에 정착한 그는 11살 어린 아내와 돼지를 키우고 농사를 지으며 아들딸을 키웠다. 

    서른일곱 살 청년이 104세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많은 것을 안겨준 춘천은 그에게 고향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매년 명절이면 이북 땅에 묻힌 부모님 생각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진다. 그에게 명절은 곧 ‘효(孝)’라서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해져서다. 

     

    이안조 어르신은 20여명이 넘는 대가족을 이뤘지만, 추석마다 이북 부모님을 위한 차례를 올린다. (사진=본인 제공)
    이안조 어르신은 20여명이 넘는 대가족을 이뤘지만, 추석마다 이북 부모님을 위한 차례를 올린다. (사진=본인 제공)

    그런 그에게 가장 인상적인 추석은 7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전쟁을 맞닥뜨린 어르신은 1‧4후퇴 때 배를 타고 월남했다. 남한에 도착하기 전까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공습 공포로 피폐했지만 추석 차례는 잊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차례를 거르면 안 된다는 어르신 신념에 따른 것이다. 

    이 어르신은 “공습 위험으로 큰 소리를 낼 수 없던 전쟁 중에도 추석에는 사람들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성묘했다”며 “남쪽으로 내려온 후에는 명절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차례를 지냈다”고 말했다. 

    어르신은 “차례는 낳아주신 조상에게 효도하는 방식”이라며 달라진 명절 분위기에 대한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차례나 제사에 대한 개념이 흐려져 아쉽지만 그래도 좋아요. 세상이 바뀌는 것을 어쩌겠어요. 저는 올해도 부모님을 위한 차례를 지낼 거예요.”

     

    오탁 어르신은 일가친척이 모이는 추석을 가장 즐거웠던 날 중 하나로 회상했다. (사진=최민준 기자)
    오탁 어르신은 일가친척이 모이는 추석을 가장 즐거웠던 날 중 하나로 회상했다. (사진=최민준 기자)

    일제강점기에도 추석상에 송편은 빠지지 않았어요.

    또 다른 어르신은 일제강점기 시절 추석 이야기를 들려줬다. 올해 100세를 맞은 오탁 어르신은 ‘추석’ 이야기에 미소를 보이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 매일 경로당에 출근 도장을 찍는 오 어르신은 추석을 가장 즐거운 날 중 하나로 기억한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일제강점기 때는 더 추석을 기다렸다. 풍족하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추석만은 넉넉하게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추석날 야학과 서당에서 공부하다 집에 돌아가면 친척 어르신들이 한데 모여 회포를 풀고 있었다. 일가친척은 각자 단정한 한복을 꺼내입고 지난 이야기들을 나눴다. 차례상은 쌀밥 대신 보리밥이나 수수밥을 올렸지만 송편은 빼놓지 않고 빚었다. 6‧25전쟁 때는 미국으로부터 쌀 배급을 받아 명절을 보냈다. 지나온 인생이 다사다난했지만, 추석 만큼은 즐거운 날로 기억되는 이유다.  

    명절에도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드물어진 요즘, 어르신은 더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고 전했다. 오 어르신은 “나는 이제 많이 돌아다닐 수 없으니 얼굴을 보러 와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라며 “올해 추석은 아들, 손자와 함께 보낼 생각에 즐겁다”고 말했다. 어르신은 명절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추석은 그저 잘 먹고 재밌게 보내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모두가 즐거운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행복한 추석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최민준 기자 chmj0317@mstoday.co.kr

    (확인=한승미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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