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시민과 3000명의 일본인이 유혈충돌할 뻔했다.
  • 스크롤 이동 상태바

    춘천시민과 3000명의 일본인이 유혈충돌할 뻔했다.

    1945년 해방되던 날 춘천 풍경은
    독립운동가들이 치안위원회 구성
    해방 만세 목소리 안들린 하루
    일본인이 많은 도시, 불안 가중

    • 입력 2024.08.15 16:02
    • 수정 2024.08.22 22:56
    • 기자명 김동섭 편집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45년 8월 16일 서울 시내를 가득 채운 만세 함성. 사진=국기기록원
    1945년 8월 16일 서울 시내를 가득 채운 만세 함성. 사진=국기기록원

     

    1945년 8월15일 수요일 낮 12시 히로히토 일본 왕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전날 밤 9시부터 일본 왕의 중대 방송이 예고되어 춘천시내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었다. 김우종(초대 강원일보 사장)도 라디오 방송을 죽림동에 있던 동생 집에 와서 들었다. 1937년 징역 2년의 옥고(치안유지법)를 치르고 신사참배 거부로 평양에서 목사 자격까지 박탈당한 뒤 1943년 낙향한 그였다. 히로히토의 중대 발표는 “미·영·중·소 4개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내용이었다. 항복이나 종전이라는 구체적인 용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연희전문·중국 남경 금릉대학을 나온 그는 4개국 공동선언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김우종은 이튿날 오전 10시 치안위원회 위원들과 위원장 자격으로 강원도청에 갔다. 도지사와 관료들과 함께 만나 행정권과 치안권 이양을 요구했다. 치안위원회는 부위원장에 당시 중앙감리교회 목사이던 이경중, 청년부장은 신영철, 치안부장은 조선일보 기자 출신의 유화청이었다. 치안위원회는 감리교회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결성한 것으로 본부도 요선동에 있는 중앙감리교회 지하실에 마련했다.

    치안대는 일제의 춘천경찰서(현재 도청 인근)를 접수해 무기를 인수받았다. 장총(99식)과 권총, 목총이었고, 치안대원은 ‘치안대’라고 쓴 완장을 찼다. 춘천이 이처럼 치안권 등을 확보한 것은 당시 강원도지사와 춘천경찰서장이 모두 한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친일파 논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른 지역의 풍경은 달랐다. 원주는 8월16일 일본인 경찰서장이 먼저 한국인 유력자 등과의 모임을 요구했다. 군수·읍장의 지휘 아래 치안단이 치안을 유지할 것 등을 요청했다. 횡성도 일본인 경찰서장이 군내 자치위원장과 회동해 일본인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강릉은 건국준비위원회 200여명이 경찰서로 몰려오자 일본인 서장은 경찰권은 양도했지만, 무기는 건네지 않았다.

    특히 이날 12시 일본의 항복소식은 일본인을 중심으로 춘천 시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춘천은 도청소재지로 관공서가 많았고 전국 읍 중에서도 일본인이 대거 몰린 지역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춘천 주민 13명 중의 한명꼴(3360명)이었다. 1943년 읍(邑)인구 통계를 보면 일본군대 주둔지인 진해, 함흥 등을 제외하면 청주(3833명), 여수(3447명)에 이어 세번째로, 수원(3115명), 순천(3314명)보다 많았다. 강원도에서도 강릉, 원주, 철원, 평강보다 훨씬 많았다.

    해방을 축하하는 만세 소리는 춘천에서 크지 않았다. 일본이 항복했지만, 무장해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해방 축하 만세 시위는 주로 젊은 학생들이 나서야 하는데 춘천중 4~5학년생 등 고학년 학생들은 여름철 근로봉사를 하러 양양의 철도부설 공사 현장에 가 있던 탓이었다.

    일본 왕의 항복 선언이 방송되자 관공서의 분위기도 싹 바뀌었다.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강원도청의 학무과는 이날 오후에 책상, 출석부 등 일본인이 사용하던 물품은 이미 한쪽 구석으로 치워졌다고 했다. 도립병원은 16일에 태극기가 게양됐다고 했다. 원장실에 있던 일장기를 떼다가 덧칠해 누군가가 만든 것이었다. 아마도 관공서에 휘날린 첫 태극기였을 것이다.

    서울에 건국준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강원도에서도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 지부가 구성됐다. 도 및 군위원장은 김우종이 맡고 부위원장은 이경중·신영철, 청년부장 남궁태, 조직부장 박형택, 무경부장(경찰) 이병한, 총무부장 황환승, 총무부 차장 이창근, 치안대장 유화청(그후 신옥철)이었다. 서울의 건준과 연결고리는 남궁태였다. 1938년 춘천고 상록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던 그는 8월14일에 이미 서울에 다녀왔다. 이경중은 1917년 개성 한영서원의 애국창가집 사건으로, 신영철은 1939년 춘천의 ’무명그룹‘사건으로, 박형택은 1930년 춘천의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각각 옥고를 치른 이들이었다. 이창근 훗날 강원도지사, 신옥철은 춘천시장과 국회의원을 지냈다.

    해방 직후 곳곳에서 일본인들과 충돌했다. 8월20일쯤 춘천에서도 일본인들과 대 충돌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질 뻔했다. 김우종 위원장은 회고록에 기록을 남겼다.

    “시내에 있는 일본인들이 모두 일본군의 징병업무를 담당하는 병사부(소양로4가)에 무장한채 모여 있다는 것이다.  밤 12시에 치안(자치)위원회가 춘천시민을 동원해 일본인을 몰살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선제 공격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병사부로 가서 허위정보라며 우리가 독립된 이상 일본인들을 안전하게 귀국하도록 해준다는 확인서까지 써주었다. 춘천사람들도 일본인들이 기습해 온다며 그날 밤 중도나 봉의산으로 피신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춘천, 그리고 강원도는 해방을 맞아 일제의 권력이 치안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같은 지역민들의 권력으로 직접 이동했다. 그러나 항일 투쟁으로 뭉쳐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은 해방날도, 이튿날도 해방 축하나 독립 만세를 한목소리로 외치지 못했다. 오히려 건준에 참여한 춘천, 강원도 사람들은 좌익과 우익으로, 찬탁, 반탁으로 엇갈린 길을 가면서 도내에서도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키게 됐다.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저작권자 © MS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18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