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에는 효자동이란 지명이 있다. 마땅히 춘천의 효자와 연관이 있기에 붙여졌으며 전국에는 효자동이 다섯 곳으로 파악된다. 춘천 효자동을 포함해 서울시, 고양시, 전주시, 포항시 등에 있으며 모두 이름난 효자 이야기가 따라 전해지고 있다.
춘천 효자동의 유래는 조선 선조 때의 효자 반희언과 관련이 있으며, 지명 유래에 하늘의 감동, 호랑이, 산삼, 딸기, 잉어 등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전국 효자 이야기를 모아놓은 듯하다.
춘천에는 반희언과 짝을 이룰만한 효자가 있었으니 박주국이 그 주인공이다. 반희언이 효자로 정려문을 받은 뒤 100여 년 뒤인 1727년에 태어났으며 사후 90년 뒤인 1854년에야 정려를 받았다. 반희언에 필적할 만한 춘천의 효자 박주국(1727~1764)에게 정려가 내려지기까지는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박주국은 영암 박씨로 그의 고조 박몽량이 춘천으로 이사하면서 동내면 거두리에 자리를 잡게 된다. 박주국 가문이 춘천에 정착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문서와 상소문은 김현식 소설가가 2023년 춘천문화원에 기증한 고문서에 들어 있다.
이 문서가 「증조고가장초(曾祖考家狀草)」로 박주국의 증손 박세영이 작성하였다. 이 문건에 박주국을 비롯한 3대에 걸친 효행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러한 효행이 박주국 사망 후 27년 뒤인 1791년부터 춘천부 유생을 포함한 강원도 유생으로 구성된 연명 상소를 통해 조정에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3대에 걸친 효행은 박주국 사후 90년이 지난 1854년에 와서야 빛을 보며 정려가 내려진다. 1791년을 시작으로 1797년, 1799년, 1801년, 1804년, 1817년, 1818년, 1823년, 1830년, 1832년, 1834년, 1835년, 1838년, 1850년, 1851년(3회)에 이르기까지 60년 동안 총 16차례에 걸쳐 상소가 이루어졌다. 16차례의 상소에는 춘천부와 강원도 유생 400여 명이 세대를 이어가며 함께 하였다. 60년 동안 16차례의 연명 상소가 이어졌다는 점도 놀랍고 1851년에만 3차례의 연명 상소를 올리고 3년 뒤인 1854년에 끝내 결실을 이룬 점은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한다.
박주국에게 내려진 정려는 당시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으며, 급기야 정려 후 1862년경 출간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수록되기에 이른다. 이 책자에는 308명의 인물이 다양한 방면에 수록되어 있으며, 박주국은 조선을 대표하는 춘천 효자로 당당하게 실려있다. 이 책에 박주국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주국은 춘천 사람으로 몸을 닦고 행동을 돈독하게 하였으며 즐겨 「소학(小學)」을 읽었고 어버이 섬기기를 정성을 다하였다. 아버지가 이질로 여러 달 앓아 거의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의원이 ‘오직 자라로만 치료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마침 장마철이어서 개울물이 크게 불어서 자라를 잡을 수 있는 길이 없자 울부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아버지가 혼미한 가운데 “신인(神人)이 나에게 너에게 효성스러운 아들이 있구나. 하늘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큰 자라를 너의 문 앞 밭도랑에 내려보낸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즉시 그것을 잡아다 복용하니 아버지의 병이 바로 차도가 있었다. 아버지가 또 구운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박주국이 곧바로 근처 숲으로 가니 꿩 한 마리가 매에게 격추(擊墜)되어 있어서 그것을 가져다가 바쳤다.
박주국의 효행에 감동한 하늘이 자라를 내려주어, 이를 복용한 아버지 박리원의 병세는 호전되었다. 이후 구운 꿩고기를 다시 드시고 싶어 하자 역시 매가 잡아놓은 꿩을 얻을 수 있었으니, 이 또한 하늘이 감동하여 내려주었다.
박주국 일가가 조정으로부터 받은 정려는 현재 동내면 거두리 정려각에 보관되어 있다. 가끔 정려각 앞을 지나며 정성을 다하는 마음에 하늘의 감동이 더해져 가슴이 뭉클해진다.
■ 허준구 필진 소개
-전 춘천학연구소장
-강원도 지명위원회 위원
-춘천시 교육도시위원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