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은 인제 인북천에서 발원하여 인제 양구를 거쳐 춘천을 지나 북한강에 합류하는 최대의 지류이다. 소양강에 댐이 세워지기 전에는 떼로 가지런히 엮은 뗏목이 줄을 지어 서울 노량진이나 마포를 향하여 갔다. 뗏목의 행렬이 춘천 소양강을 지날 때면 ‘강원도 아리랑’ 조의 ‘뗏목 아리랑’이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서울로 향하게 했다.
“뗏목에 서방님 좋다더니 신연강 포아리가 아직일세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오 할미여울 물안길로 차자를 가세
봉의산 정자는 구경정자 소양강 정자로 만나보세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오 신연강 포아리를 돌아만가세.” -인제뗏목아리랑 中
떼꾼은 뗏목을 한 번 나르고는 단단히 한몫 챙겼는데, 19세기 중엽 통상 고을 원님의 월급이 20원 정도였던 반면에, 떼꾼은 35~40원 정도를 벌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떼돈 벌었다’라는 말이 생겼고, 한몫을 챙긴 떼꾼은 떼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며 춘천의 덕두원 주막이나 샘밭 주막에 들러 주막집 여인네의 분 냄새에 많은 돈을 뜯기고 빈손으로 돌아가기 다반사였다고 한다.
소양강에는 나루가 여럿 있었고 춘천 시내와 가까운 몇 곳을 소개하면, 신북읍 샘밭과 동면 지내리를 이어주던 워나리나루, 신북읍 율문리와 동면 하일을 이어주던 할미여울나루, 우두동과 동면 상일을 이어주던 우두나루, 소양동과 우두동을 이어주던 소양나루 등이 비교적 많이 알려져 친숙한 나루였다. 소양나루는 아주 오래전부터 소양1교 근처에 있었지만, 의암호가 형성되고 소양2교 바로 옆으로 옮겨와 운영되었다.
오래전 나루를 오가던 배는 나무로 만든 목선이었고 노를 저어서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노를 젓는 사람이 배의 중앙에 앉아 노를 저었기에 배의 공간은 자연스레 앞뒤로 나누어진다. 앞쪽으로 좁아지며 뾰족한데 사람이 앉고 뒤쪽은 넓게 제작하여 비교적 무게가 나가는 물건을 실어서 배의 앞쪽이 들리도록 하여 물살을 손쉽게 가르며 나가도록 하였다. 강폭이 좁았던 나루에서는 목청껏 소리를 질러 뱃사공을 불러 운행하였고 학생과 농산물을 팔러 가는 동네 아낙들이 주 고객이었다.
의암호가 생기고 나서 1970년대는 아침이면 시내 학교로 등교하는 학생과 농산물을 팔고자 하는 아낙들이 서면의 신매리 금산리 방동리 등지에서 통통거리는 동력선을 타고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받으며 소양나루로 쏟아져 나왔다. 학생은 바삐 학교로 향해서 갔고 농산물을 가지고 나온 아낙들은 서부시장 상인에게 물건을 넘기기도 하고 즉석 좌판을 벌여 팔기도 하였다. 여기에 우두동에서 소양2교를 건너 농산물을 가지고 나온 아낙들이 가세하며 순식간에 장이 섰다. 이른 아침 순식간에 장이 섰다 파했기에 이를 번개시장이라고 불렀고 2000년 신매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이런 광경은 지속되었다.
소양강에는 영서 제일 누정으로 불리는 소양정이 삼한 시대부터 있었다. 인제 뗏목 아리랑에도 봉의산 정자 소양강 정자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 정자는 양반님네의 전유물이었고 서민의 일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소양정은 봉의산과 소양강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이요루(二樂樓)라고도 불렀다. 춘천을 방문한 시인이라면 누구나 올라가 시를 지어 남겼을 정도로 춘천 풍류와 유람문화의 명소로 각인되어 있다.
지금은 댐으로 강은 흐르지 않고 호수가 되었다. 호수가 되면서 서민의 애환을 노래로 풀어내던 뗏목은 멈추었고 호수에 다리가 놓이면서 등교하던 학생과 농산물을 잔뜩 이고 진 아낙을 싣고 강을 오가던 배도 끊어졌다. 소양나루 주변에 섰던 번개시장 또한 이제는 상설시장으로 바뀌었다. ‘세월은 가고 사랑은 남는 것’이란 유행가 가사가 맞기는 한 소리인지 왠지 궁금해진다. 세월은 가고 추억만 남는 것은 아닐까!
■ 허준구 필진 소개
-전 춘천학연구소장
-강원도 지명위원회 위원
-춘천시 교육도시위원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