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서울 쪽에서 강원자치도 춘천으로 들어가면 만나는 곳이 강촌이다. 한때 대학생들이 낭만을 찾아 여행을 가거나 ‘엠티(MT)’를 갈 때면 늘 거론되는 곳이었다. 춘천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강촌에서는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강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적 공간특성을 획득한 곳이다. 강촌이 행정구역상으로 춘천시에 속한다는 점을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강촌이 젊은 시절의 한때를 즐겁게 보낸 곳이라는 아름다운 기억이 공간적 특성을 형성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강촌에서 산 쪽으로 더 들어가면 구곡폭포라 불리는 문폭(文瀑)이 있고, 그 옆의 산자락을 타고 20분가량 천천히 올라가면 산꼭대기에 마을이 나온다. 바로 문배마을이다.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때는 전쟁이 난 줄도 모르고 살았다고 전해질만큼 첩첩산중 오지 마을이다. 지금이야 자동차가 들어가는 곳이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처음 문배마을에 갔을 때는 봄이었다. 살구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있을 때였다. 주말에 등산하려는 친구들을 따라나선 길이었다. 약간의 땀과 조금 거친 숨을 뱉으며 정상에 올라가서 산굽이를 돌자 마법처럼 마을이 나타났다. 감탄스럽기도 했고 신비롭기도 했다. 이렇게 깊은 산중에 이런 마을이 숨어 있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문배마을이라는 이름은 산꼭대기 마을의 모양이 배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는 설도 있었고, 문폭의 뒤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문배(文背)’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었지만, 문배 나무가 많다고 해서 그렇게 명명되었다고도 했다. 문배 나무는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에 어떤 나무인지 궁금했다. 일행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마을 주민에게 물었지만, 그들 역시 정확하게 모를 뿐 아니라 문배 나무가 예전에는 정말 많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는 말만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문배 나무가 궁금했다.
내 관심사 속으로 문배 나무가 다시 들어온 것은 허균의 ‘도문대작’을 읽을 때였다. 낯선 항목이 있었는데 바로 대숙리(大熟梨)라는 과일이었다.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기록에 보이지 않으니 무엇을 지칭하는지 도저히 요령부득이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었다. “대숙리(大熟梨). 속칭 부리(腐梨)라고 부른다. 산중에서 많이 나는데, 곡산(谷山)과 이천(伊川)의 것이 매우 크고 맛도 정말 좋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허균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이름인 ‘부리(腐梨)’를 함께 병기하였다. 이것을 실마리로 삼아서 대숙리가 무엇인지를 추정해 보기로 했다. 우선 ‘부리’는 문배를 지칭하는 것으로, 문향리(聞香梨)라고도 부른다는 점을 확인했다. 대숙리와 마찬가지로 문향리라는 이름 역시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대숙리든 문향리든 간에 이것이 모두 부리를 지칭하는 말이라면, 이들은 모두 문배를 가리키는 단어인 셈이다. 허균이 전하는 정보는 산군(山郡) 즉 산골 마을에서 많이 난다는 점, 특히 곡산과 이천에서 크고 맛있는 대숙리가 난다는 점이다. 사실 이 문장 마지막에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不可殫記)’라는 문장은 무엇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모호하기는 하다. 그러나 문맥이나 문장의 흐름으로 보아 이 구절은 앞부분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보면 허균은 곡산과 이천의 문배가 크고 맛있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라는 의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숙리가 문배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렇게 명명한 것일까? ‘대숙(大熟)’이라는 말은 크게 익었다는 뜻이다. 대숙리는 완전하게 익은 배라는 의미다. 그렇게 보면 허균이 소개한 속칭 ‘부리(腐梨)’라는 말과 맥락을 같이 한다. 부리는 썩은 배라는 뜻이다. 배는 쉽게 상하는 과일이다. 그것을 딸 때 작은 나뭇가지에라도 부딪치게 되면 그 부분이 금세 검게 변색되면서 물러진다. 그런 과일이 완전하게 익으면 당연히 과일의 속 부분 과육이 물렁물렁하게 되고 쉽게 썩는다. 그런 점에서 허균이 부리를 대숙리라는 이름으로 항목화한 것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문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배와 비교할 때 크기도 작으면서 단단하기까지 하다. 문배를 따서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는 것은 이 때문이다. 썩은 배라는 뜻의 부리라는 속칭은 이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보이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 허균이 말하는 대숙리는 문배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배와는 다른 품종으로, 강원도 산간에서 흔히 보는 배는 크게 돌배와 신배 두 가지일 것이다. 과일 맛을 즐기듯이 이들을 먹는 일은 어려우므로 지금은 대부분 술을 담그는 용도로 쓰인다. 허균이 대숙리를 서술한 내용을 가지고 비교해 본다면 이들과는 다른 품종임이 틀림없다. 특히 허균은 대숙리가 ‘맛이 매우 좋다(其味甚佳)’고 했으니, 돌배나 신배와는 거리가 멀다. 대숙리를 세상 사람들이 부리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했고 부리는 문배를 지칭하는 용어이므로 대숙리를 문배로 보는 것이 어지간하지 않은가.
문배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아마도 문배주 때문일 것이다. 1986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문배주는 조, 수수와 누룩으로 빚어내는 증류주이다. 흔히 평안도 지역에서 전승되어 오는 전통주로, 문배 나무의 열매에서 나는 향이 풍긴다고 해서 문배주라고 부른다. 많은 전통주가 양조 과정에서 들어가는 재료로 이름을 붙인 데 비해서 문배주는 문배의 향 때문에 명명되었다고 하니 특이하기는 하다. 외국의 정상들이 한국을 공식 방문했을 때 문배주를 대접한 적이 있으며, 특히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의 정상이 건배주로 선택되어 유명해지기도 했다. 문배주는 문배와는 관계가 없는 술이다.
1980년대 이후 강원도 춘천의 문배마을 사람들도 구경하지 못했던 문배 나무는 2021년부터 강원도산림과학연구원의 노력으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1935년 홍릉에서 발견된 이 나무는 1966년에 한국의 특산종으로 등록이 되었다고 하는데, 문배 나무 원종에서 접수(椄穗)를 채취해서 24년간 보존해 오던 것을 증식시켜서 2022년 문배마을에 심기 시작했다. 이제 봄날이 되어 문배마을을 들어서면 하얀 꽃과 함께 짙은 향기를 즐길 수가 있는 가을이면 노랗게 익어가는 열매를 볼 수가 있게 되었다. 아울러 깊은 산중에서 만나는 문배 나무에서 허균을 떠올릴 수도 있게 되었다.
내년봄엔 문배나무 꽃을 볼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