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는 길이 없다. 강원도 고성 통일 전망대에서 시작한 해파랑길 도보여행은 부산 오륙도 선착장에서 마무리했다. 17일 동안 동해안 길을 따라 770km를 걸어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무사히 목표를 완수한 뿌듯함을 셀프카메라 렌즈에 마구 쏟아냈다. 그렇게 도보여행 영상의 마무리 크레딧을 찍었지만, 불현듯 허탈감이 밀려왔다. 아마도 보름 넘게 너무도 강렬하고 뚜렷한 목표를 갖고 하루하루 그 목표를 달성하며 걸어왔는데, 이제는 역설적으로 그 목표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부산에 도착하면 2박 3일 동안 여유롭게 쉬며 여행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보름 넘게 매일 40km 이상 걷던 습관 때문인지 아침에 일어나 걷지 않으니 허전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냥 다시 걷기로 했다. 그렇게 부산대에서 시작한 도보여행은 부산교대, 부경대를 거쳐 영도다리 건너 부산해양대에서 마무리되었다. 커다란 배와 바다가 어우러진 멋진 캠퍼스에서 마지막 촬영을 끝으로 도보여행이 진짜로 끝났다.
이제는 정말로 쉬어야지. 도보여행 기간 5만 원도 안 하는 싸구려 숙소만 전전했으니 이번만큼은 ‘Flex’ 해야지. 해운대 야경이 보이는 4성 호텔에 체크인한 후 느지막이 저녁을 먹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부산에 왔으니까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 돼지국밥을 먹어야지. 보름치 빨래 한 무더기를 코인 빨래방에 맡기고 돼지국밥집 찾아 떠났다.
해운대역 대로변에 있는 돼지국밥집에 무작정 들어갔다. 그런데 이제 막 영업이 끝났다며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고 하신다. 화려한 간판의 건너편 돼지국밥집도, 맛집으로 유명한 근처 돼지국밥집도 영업 종료다. 원래 이쯤 되면 포기하고 다른 음식을 먹을 법도 한데, 원래 내가 한번 무언가를 하려고 결심하면 무조건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해운대 중심도로에서 약간 벗어난 주택가 근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맛있는 돼지국밥을 먹는 게 아니라 돼지국밥 자체를 먹는 것이 목표가 됐다.
벌써 네 번째 허탕이다. 이미 17일 하고도 하루를 더 걸은 상태라 피곤은 쌓일 대로 쌓였고, 그냥 호텔 앞에 있는 24시간 소머리 국밥에서 대충 때우고 싶다는 유혹이 밀려왔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돼지국밥집을 찾아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마치 상산의 노인네를 등에 업고 수차례 개울가를 건넌 유비처럼. 하다가 멈추면 그동안의 수고로움마저 사라져 버리니까!
그렇게 또다시 10분을 걸어서 드디어 문이 열린 돼지국밥집을 찾았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어서 손님은 별로 없었고 특별할 것도 없는 식당이었지만, 무려 다섯 번 만에 돼지국밥을 먹었다는 그 자체로 짜릿한 성취감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여행은 이렇게 별 시답지 않은 상황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얻는 게 아닐까? 돼지국밥 특을 주문하고 마늘과 혼합양념, 그리고 안 넣고 따로 먹으면 부산 현지 사람들이 불편해한다는 정구지를 듬뿍 넣어서 맛있게 먹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돼지국밥 한 그릇 뚝딱하고 다시 돌아오는 길. 한여름 밤 해운대는 별빛처럼 화려한 네온사인과 저마다 하늘로 누가 더 높은지 경쟁하는 빌딩들로 가득하다. 빨래방에서 건조된 뽀송뽀송한 빨래를 한 무더기 안고 호텔로 들어왔다. 럭셔리한 4성급 호텔을 즐길 여유도 없이 피곤한 몸에 뜨끈한 국밥까지 배부르게 먹고 나니 졸음이 한 번에 밀려왔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침대 쿠션에 기대어 올림픽 배구 경기를 보다가 시나브로 잠이 들었다.
울산에도 돼지국밥 잘하는집
있어서 자주 다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