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지역 동네의원 180곳 가운데 10곳중 한곳꼴인 23곳이 ‘피부미용’을 진료 과목으로 내걸고 운영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외과나 산부인과,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이 자신의 전문과목을 포기하고 피부과 진료로 간판을 바꿔 단 경우도 10곳에 달했다. 이처럼 필수의료로 지칭되는 외과, 응급의학과, 산부인과 등의 전문의들이 피부과로 몰려들면서 지역 필수 의료 인프라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본지가 24일 춘천보건소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분석한 결과, 춘천지역에서 개원한 동네의원은 총 180곳으로 집계됐다. 이 중 외과, 흉부외과, 산부인과 등 전문분야 의원이 127곳이고, 자신의 전문(진료)과목을 표시하지 않고 ‘○○의원’ 등으로 운영중인 의원은 53곳이었다.
이런 동네의원 중 피부과 전문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의사가 진료 과목의 하나로 피부과를 내건 의원이 32%에 달하는 17곳이었다. 제모나 리프팅, 보톡스 등 피부미용 시술을 하는 의원들로, 실제 피부과 전문의가 운영하는 피부과 6곳에 비해 두배나 더 많았다.
특히 자신의 전문과목을 포기하거나 별도의 피부미용 클리닉을 개설해 피부과목으로 운영하는 의원은 10곳이었다.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5곳으로 가장 많았고, 산부인과 전문의 2곳이었다. 외과, 응급의학과 전문의, 재활의학과 전문의가 각각 1곳이었다. 나머지 7곳은 의대만 졸업했거나 인턴을 마친 일반의가 개원한 의원이었다.
의대를 졸업해 의사 국시를 통과한 의사가 전문의를 취득하기까지는 졸업 후 보통 4~5년이 더 걸린다. 이 기간 연봉 5000만~6000만원 정도를 받으며 전공의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거친 후 전문의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이렇게 어렵게 전문의를 취득하고도 자신의 전문과목이 아닌 피부과를 개원하는 이유는 피부미용 진료 수입이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피부과 의원에서는 주로 미용 시술을 하는데, 비급여 진료가 대부분이어서 이윤이 크다.
▶의대 졸업 후 4~5년 더 공부해 전문의 따고, 개원은 피부과로
이 때문에 필수의료과목을 포함해 전문의들조차 피부과로 쏠리는 현상이 심각하다.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고 일반의 자격으로 피부과를 개원하면 소위 ‘워라밸’도 챙길 수 있고 더 큰 수입도 보장된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2022년 보건사회연구원이 조사한 '보건의료인력실태조사'에서도 피부과는 수입이 연 3억원에 달하는 반면, 소아청소년과는 1억800만원에 그쳤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해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작년 출생아가 춘천과 인근의 화천, 양구를 합쳐도 불과 1500명에 그친다. 20여년전인 2000년의 3400여명에 비해 반토막났기 때문이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A씨는 최근 서울에 있는 피부과로 이직을 결심했다. A씨는 “소아과의 높은 업무 강도와 낮은 수가에 비해 비급여 진료가 많은 미용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뒤 피부과로 개원할 계획”이라며 “과거에는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으면 진짜 의사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최근 10년간 춘천에 개원한 동네의원 수에서도 피부과 쏠림 현상이 관측된다. 본지가 춘천보건소에 정보공개 청구한 결과, 2014년부터 올해 7월까지 춘천지역에서 개원한 의원은 총 76곳이다. 이 가운데 피부과를 주 진료과목으로 내걸고 개원한 의원이 10곳이다. 올해 7월 기준 춘천에서 피부과 진료를 보고 있는 의원 23곳 가운데 43.4%에 달한다. 10년새 피부미용 시술 의원들이 크게 늘었단 얘기다. 일부 프랜차이즈로 운영되는 피부과는 한때 10여명의 의사를 고용할 정도로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애 낳는 산부인과 3곳, 응급환자 뺑뺑이 빈번
피부과같은 인기 진료과목 쏠림 현상은 지역 필수의료 붕괴를 앞당긴다는 지적이다. 의사 시험을 통과하거나 전문의를 취득하고 시장에 공급되는 의사 중 과도한 숫자가 피부과로 쏠리기 때문에 필수의료 인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춘천에 있는 산부인과(의원 포함) 7곳인데, 그나마 분만을 할 수 있는 산부인과는 3곳에 불과하다.
소아청소년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필수의료과목인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로 개원한 동네의원은 최근 10년간 각각 5곳, 2곳에 불과하다. 특히 산부인과는 10년 전인 2014년 7곳에서 개업과 폐업을 반복하며 현재도 7곳이다. 실제 의원 수는 늘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소아청소년과는 2014년 7곳에서 증감을 반복하다가 올해 11곳으로 늘었다.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응급실을 찾지 못해 뺑뺑이를 도는 경우도 다반사다. 올해 2월 밤 11시 48분쯤 춘천에서 의식을 잃은 환자가 발생했다는 신고를 접수한 119 구급대는 강원대병원 등 7개 병원 응급실을 수소문했지만 전문의가 확보될 때까지 구급차 안에서 대기하다가 신고 접수 2시간 54분만에 춘천 성심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올해 2월 춘천에서 분만한 지소영(34)씨는 “춘천에서 분만할 수 있는 산부인과는 대학병원까지 하면 5곳 정도 있지만, 대학병원은 대기가 길고 예약하기가 어려워 급할 땐 동네 산부인과를 찾아야 한다”며 “동네 산부인과 중에서 분만이 가능한 산부인과는 3곳에 불과해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빠르게 대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의대 증원만으론 한계, 필수 과목 처우 개선을”
정부는 지방 필수의료 붕괴를 막겠다며 의대 증원을 강행했다. 피부과와 성형외과 등 인기과로 지원이 쏠리는 것을 막을 수 없으니 의사 공급을 늘려 경쟁을 유발, 필수과목의 지원을 늘리는 점(낙수효과)이 주요 근거다. 또 공공의대 설립과 지역 의대를 졸업하면 해당 지역에서 의무 봉사하는 지역의사제를 통해 인기 진료과목 쏠림 현상을 막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의료계의 입장은 다르다. 아무리 의사 수를 늘려도 기피과는 여전하기 때문에 산부인과나 소아청소년과 등은 수가 인상을 비롯한 특별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들은 필수의료 과목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의사 증원안에 대해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제언한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사무처장은 “산부인과, 응급의학과와 같은 필수의료 의사 수를 늘리려면 수가 현실화와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책임을 완화하는 방안을 동시에 검토해야 한다”며 “정부가 2000명에서 단 한 명도 꺾을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버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종혁 기자 ljhy0707@mstoday.co.kr
(확인=한상혁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