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미국에서 방영되고 한국에서도 리메이크됐던 드라마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는 굉장히 흥미로운 설정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미국의 대통령, 부통령 그리고 주요 인사가 모두 테러로 희생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지정되어 안전한 곳에 있던 가장 말단 장관이 급하게 정부의 수반이 되고, 이후 닥치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간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시민들이 주권을 위임한 최고 권력이 부재한 상황이 되었을 때 누가 시민들의 주권을 위임받는 것이 정당하냐는 질문은 매우 예민하면서도 진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계엄 사태의 책임자가 대통령을 대신하는 모순
계엄 사태와 탄핵으로 혼란스러운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리라는 기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 총리가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들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정국이 다시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야당에서는 한덕수 권한대행에 대한 탄핵안도 고려 중이라고 한다. 야당이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것이 정당했는가 등의 논쟁도 해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이미 계엄을 의결하는 국무회의에 참석해서 사태를 일으킨 일원 중 한 명인 한덕수 국무총리가 계엄 사태로 탄핵소추 된 대통령을 대신해서 정부를 대표하는 것이 너무나도 이상한 상황이기는 하다. 한덕수 총리를 비롯하여 현재의 내각 구성원들은 모두 계엄 사태에 대한 법적, 정치적 책임이 있는 이들이다. 이들에게 다시 우리의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겨야 하는 이런 역설적인 상황은 왜 발생했을까?
| 미국 대통령직 승계 서열 2위는 하원의장
다시 드라마 ‘지정생존자’로 돌아가 보자.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내각 구성원이 사망했기에 말단 장관에게 권력이 넘어간다고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미국의 헌법은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으로, 부통령까지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행정부’의 장관들이 아닌 ‘의회’의 수반인 ‘하원의장’이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게 되어 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선출된’ 권력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의 주권은 선출된 권력에만 위임되고 그래야만 한다.
| 87년 체제가 만든 딜레마
같은 대통령제를 시행하고 있는 미국의 헌법과 다르게 87년 민주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한국의 헌법은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이 부재할 경우 권한대행을 국무총리, 부총리 그리고 행정부의 장관들 순으로 모두 비선출 권력자들을 계승 서열로 지정하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지금 계엄선포의 당사자들에게 다시 시민들의 주권을 위임한 것과 같은 이상한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한덕수 대행 체제는 임시방편
앞서 두 차례 있었던 대통령 탄핵 때는 이렇게 이상한 문제가 돋보이지 않았다. 내각 전원이 계엄사태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지금은 이 딜레마가 너무나도 크게 드러나고 있다. 100보 양보해 국정 공백과 안보 환경 등을 고려해 한덕수 국무총리가 ‘행정부’를 임시로 대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시민들의 주권을 위임받아 ‘행정, 사법, 입법’을 총괄하는 대한민국 ‘정부’를 정당성 있게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 주권을 위임받을 수 있는 건 선출된 권력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헌법을 바꾸기보다 헌법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민주주의 정치는 문헌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해 시대에 맞는 해석과 창조적인 타협이 중요하다. 이번 계엄 사태에서 시민들이 확인한 중요한 사실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주권의 최후 보루가 바로 입법부인 ‘국회’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의회가 있어야만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고 시민들의 주권은 대통령이 임명한 총리나 장관들이 아닌 선출된 권력인 의회에 위임되는 것이다.
| 한덕수가 가야 할 길은 국회와 공동통치
만약 계엄 해제와 대통령 탄핵안 통과 직후 선출된 권력의 대표인 우원식 국회의장의 지휘 아래 여당과 야당의 대표들이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방법을 택했다면 지금과 같은 혼란은 덜했을지도 모른다. 늦었을지라도 한덕수 권한대행은 본인이 지금 행정부만을 대표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를 모두 대표하고 있지 않다는 명확한 인식을 하고 국회의장에게 국정운영에 대한 공동통치를 제안해야 할 필요가 있다.
|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선출된 권력이 아닌 자들이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개헌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대부분은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불리는 현재의 권력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이해관계에 정치적 입장들이 부딪히게 마련이고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포인트로 하나만 바꿀 수 있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헌법상 권력승계 서열이다. 대통령 다음으로 국회의 수반들을 계승 서열로 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권력을 누구에게 위임해야 정당하냐는 민주주의의 제1원칙에 관련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끝>.
조성주 정치발전소 대표
국내 최초의 세대별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을 창립했고 서울시 노동협력관, 경기도 노동정책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현재는 사단법인 정치발전소에서 민주주의와 현실 정치에 대한 교육과 연구 등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 <청춘일기>, <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