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요즘도 입시 철이 되면 엿의 판매가 급증한다. 합격을 빌면서 시험장 입구에 엿을 붙이는 행위는 1970년대 이래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풍속이거니와 엿이라는 단어의 사용처는 참으로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좋은 의미로 엿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심한 욕을 할 때도 엿이 사용된다. 엿장수를 따라다니는 아이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있었으니 오죽하면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이 있었을까 싶다. 조선 후기 풍속도에도 엿장수가 등장하고, 서당 훈장 선생님이 엿(아마도 조청일 법한 엿)을 학동들 몰래 숨겨놓고 먹다가 들키는 설화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 ‘산림경제’ 등에 엿을 고는 방법이 자세하게 기록된 것을 감안할 때 엿은 우리 생활 문화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음식이라 하겠다.
엿은 어떤 곡식으로든 만들 수 있지만, 쌀로 만드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정말 가난한 집에서는 옥수수를 쓰기도 했지만 그래도 설 명절이 아니던가. 추석과 함께 일 년 중에서 가장 흥성스러운 명절이니 아무래도 어른들은 음식도 푸짐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곡식에 엿기름을 넣은 뒤 당화시켜서 오랫동안 솥에서 졸이면 엿이 된다. 졸여서 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조청이라 하고, 그것을 조금 더 졸인 다음 굳히면 우리가 알고 있는 딱딱한 엿이 된다. 엿을 고는 과정에서 지역의 특산물이 들어간다. 호박이 들어가면 호박엿이 되고 옥수수가 들어가면 옥수수엿이 된다. 지역에 따라 보리엿, 무엿, 꿩엿, 잣엿 등 다양한 재료들이 들어가면서 엿의 풍미가 새로워진다.
엿은 고려시대 기록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 유래는 오래되었을 것이다. 요즘이야 지역에 따라 특산 엿이 있지만, 예전에는 유명한 지역을 몇 군데 꼽았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엿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였다. “엿[飴]. 개성(開城)의 것이 상품이고 전주(全州) 것이 그 다음이다. 근래에는 한양의 송침교(松針橋) 부근에서도 제조된다.”
그가 맛있는 엿을 만드는 지역으로 개성과 전주를 들었다. 개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리지에 지역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으니 그럴 만하지만, 전주의 토산물에는 엿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세종 때 전주의 백산엿(白饊飴糖)을 특산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있기는 했지만, 지리지에는 기록되지 않을 것을 보면 이후에 조치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위의 서술에서 언급한 엿은 아마도 허균의 경험에서 비롯된 서술일 터인데, 그에게 전주는 좋은 엿을 생산하는 곳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거기에 한 군데를 더 추가했는데, 바로 한양이다. 물론 지리지에 한양의 토산물로 엿이 기록되어 있어서 예부터 한양의 엿이 특산물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허균은 송침교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명확하게 지적한다.
송침교라는 이름으로 보아 다리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기록에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에 왜 송침교에서 만드는 엿을 허균이 거론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다. 다행히 이파(李坡, 1434~1486)의 ‘청파극담(靑坡劇談)’에 송침교가 등장한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새집이 송침교 옆에 있었는데 샘물을 파다가 만난 땅속 바위 속에서 나무가 타고 남은 재와 잣나무를 발견한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에 송침교가 등장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보이지 않는다.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미암일기(眉巖日記)’ 1568년 1월 23일 기록에 송침교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보인다. 그날 유희춘은 궁궐로 들어가기 위해 한강에 도착한 참이었다. 사헌부의 서리와 하인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는데, 남대문으로 들어선 뒤에 관복을 갖추어 입고 태평관(太平館), 모전(毛廛), 사헌부를 경유, 송침교를 지나 영추문(迎秋門)으로 들어섰다고 했다. 영추문은 경복궁의 서문(西門)이니, 송침교는 사헌부와 영추문 사이에 있는 다리다. 대동여지도를 찾아보면 광화문을 오른쪽으로 두고 인왕산을 향해 올라가는 곳에 송첨교(松簷橋)라는 다리가 표시되어 있다. 바로 이곳이 송침교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송첨교는 사헌부 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여지비고(輿地備考)’에도 사헌부 서쪽에 있는 서부의 적선방(積善坊)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송침 다리로 불리었던 이 다리가 바로 허균이 엿을 맛있는 엿을 만들어내던 송침교이다.
개성과 전주의 엿은 아마도 허균이 맛본 것 중에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것이었겠지만, 특별히 송침교 인근에서 만들어지는 엿을 언급한 것은 그가 중앙 부처에 근무할 때 자주 접했기 때문에 ‘도문대작’에 수록된 것은 아닐까 싶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리지 등에 한성부의 특산물로 엿이 기록되어 있지만, 허균이 송침교라는 명확한 지점을 언급한 데에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작동했다.
송침교 아래를 흐르는 물(지금은 홍제천이라고 부른다)은 인왕산에서 발원한다. 이 물을 따라 올라가면 세검정을 지나 수성동 계곡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궁궐과도 가깝고 워낙 풍광이 뛰어나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유람하던 곳이며 돈 많은 양반가와 권력가가 별장을 짓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 중인층의 문화를 꽃피운 곳이기도 하다. 이 물을 따라가면서 두부와 같이 많은 물이 필요한 음식을 만드는 곳이 배치되어 있었으니, ‘도문대작’에서 창의문 밖에서 만드는 두부가 아주 맛있다고 서술된 곳 역시 바로 이 장소다. 그러니 엿을 고는 집도 홍제천을 따라 분포해 있었을 것이고, 허균은 여기서 만든 엿을 쉽게 맛보았을 것이다.
엿은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달고 귀한 간식거리였다. 설탕처럼 소수의 양반가나 부호만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일반 민가에서도 일 년에 한두 차례 정도는 만들거나 맛볼 수 있을 정도의 간식거리였다. 꿀과 함께 달콤함의 대명사로 제시되는 엿은 입에 넣고 씹기도 하고 굴리기도 하면서 한참을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다. 함열의 혹독한 자연환경과 가난한 귀양바치로서는 예전 한양에서 먹던 엿이 얼마나 그리웠으랴. 게다가 ‘도문대작’을 쓰던 계절이 겨울이었으니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여기저기서 엿을 고는 풍경을 목도했을 것이다.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음식 하나에도 나의 전 생애가 한꺼번에 떠오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