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 최초 학도병은 74년전 6월, 춘천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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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한국 최초 학도병은 74년전 6월, 춘천에서 시작됐다

    ‘3대 대첩’ 춘천대첩에서 학도병 활약
    탄약 운반부터 부상병 구출 등 역할
    비정규 조직에 군번도 없어 명단 몰라
    “춘천은 학도병 발상지, 명예 기려야”

    • 입력 2024.06.20 00:09
    • 수정 2024.06.21 02:33
    • 기자명 이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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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장에 모인 학생 중에 제 나이가 열아홉으로 제일 많았어요. 가장 어린 친구는 열여섯이었는데, 전쟁터로 간다는 얘기를 듣고도 덤덤했죠.”

    염기원(94)씨는 ‘6·25 참전 유공자’라고 적힌 모자를 쓰고 기자와 인터뷰하는 내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듯했다. 그는 6·25 참전유공자회 춘천시지회장으로 춘천 학도병 역사 증언에 앞장서는 인물이다. 개전(開戰) 첫날부터 학생이자 청년단 단원으로 총탄이 빗발치는 전선에서 포탄을 나르던 일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 전투에서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어깨와 다리에 박힌 수류탄 조각이 아직 남아있지만, 나는 그날 학도병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당시 춘천대첩에서 활약한 학도병들. (왼쪽) 유재식(92) 6·25 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장. (오른쪽) 염기원  6·25 참전유공자회 춘천시지회장 (사진=이종혁 기자)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당시 춘천대첩에서 활약한 학도병들. (왼쪽) 유재식(92) 6·25 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장. (오른쪽) 염기원  6·25 참전유공자회 춘천시지회장. (사진=6·25 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 이정욱 기자)

    6·25 전쟁 당시 춘천은 전국 최초로 학도병이 활약했던 지역이다. 학도병은 1950년6월29일 수원으로 피난내려간 서울지역 학생 200여명이 결성한 비상학도대가 모태로 알려졌다. 이후 7월1일 대전에서 학생 700여명이 학도의용대를 결성했고, 7월20일 대구에서 대한학도의용대라는 명칭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춘천에서는 그보다 앞서 춘천대첩(6월25~30일) 내내 학생 수백명이 군부대의 인솔아래 포탄을 나르는 등 개전 첫날인 6월25일부터 28일까지 '군번없는 군인'으로 활동했다. 학도병 생존자들이 90세가 넘는 고령임을 감안하면 더 늦기 전에 "춘천지역 3개학교(춘천중, 춘천농업학교, 춘천사범학교) 학생들이 학도병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공식 인정하고 기리기 위한 지자체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춘천대첩 참전한 학도병, 6·25 전쟁판도 바꿨다

    74년 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이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선전포고 없이 대한민국에 대한 남침을 시작했다.  당시 38선이 지나던 춘천은 가장 먼저 전투가 벌어진 지역 중 하나다.  포병부대 하사관으로 춘천대첩을 치른 최갑석장군의  자서전 '장군이 된 이등병'에서도 춘천지역 학생들의 활약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포탄을 운반할 차량을 확보한 나는 춘천중학교로 향했다. 포탄을 나를 인력이 필요했다. 일요일이었지만 학생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나는 빗줄기가 쏟아지는 차 위에 올라서서 학생들을 향해 외쳤다."북한괴뢰군의 남침이다. 춘천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탄약을 두고 가면 적들이 이것으로 우리 양민들을 죽인다. 탄약을 운반하려하니 학생들이 도와주기 바란다." 그러자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스리쿼터에 60~70명이 탔다. 나는 이중 30명만 골라타도록 했고, 다시 춘천농업학교로 향했다. 이곳 학생들은 덩치가 커서 100명을 차출해 부대로 보냈다. 오후 4시쯤 부대에 있던 포탄 5000여발(혹 3500여발)을 소양강을 건너 남춘천역 인근에 야적했다.' 

    이처럼 춘천에서 전선을 구축한 국군은 병력 규모가 4배가 넘는 북한군과 사투를 벌여 닷새간 전선을 지켜냈다. 국군 208명이 전사했고 북한군은 6792명이 사망했다. 적군의 남진이 지체되는 동안 국군은 군을 정비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6·25 전쟁에서 국군의 첫 승전이자 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춘천대첩에서 학도병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전투 중 긴급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국군들. (사진=춘천지구전적기념관)
    1950년 6월 25일 전투 중 긴급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국군들. (사진=춘천지구전적기념관)

    춘천대첩에서 활약한 학도병은 군인들을 대신해 탄약·보급품을 나르고 참호를 지키던 군인들에게 주먹밥을 전해주고 부상병을 돌봤다. 북한군의 포격으로 망가진 참호를 재정비하기도 했다.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도병 소집은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이날 새벽에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춘천 시내까지 들렸고, 곧이어 마을에 전화가 있던 집을 통해 학생들과 청년들은 학교 운동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춘천고 운동장에 모인 학생과 청년은 70여명으로 청년 20~30명을 제외하면 모두 학생이었다. 염기원 지회장은 “춘천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 앞에 국군 장교가 오더니 ‘너희는 오늘부터 학도병 소속으로 군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너희는 오늘부터 학도병” 학생들 앞다투어 지원

    춘천대첩에 참여한 학도병들은 정규군에 편성되지 않고 ‘노력동원’ ‘노무봉사’ 형태로 참여했다. "춘천고 운동장에 몇몇 장교와 군인들이 와서 노력동원을 요청했고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이 지원했다. 우리는 1949년 여름방학때도 보름간 옥산포와 내평리의 산중턱에 군인들의 교통호를 파는 작업에 동원된 적이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나도 친구들과 함께 군 트럭을 타고 봉의산 자락에 진을 치고 있던 군인들에게 포탄과 수류탄 등을 날라주고, 근화동에서 아낙네 10여명이 주먹밥을 만들면 기다렸다가 군인들에게 갖다주었다. 이처럼 포탄을 나르는 작업을 사흘간 하고, 군인들이 춘천을 철수해 홍천으로 빠져나가던 28일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유재식(92) 6·25 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장의 증언이다. 박정희 정부 초대 경제수석을 지냈던 신동식(92) 박사도 당시 춘천중 5학년으로 군인 트럭을 타고 포탄을 나르는 작업을 했다고 말한다. 

    6월 25일 당일 춘천고 뿐만 아니라 춘천사범학교, 춘천농업학교에서도 같은 증언이 이어진다.

    김유환 당시 춘천농업학교 5학년 학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군부대에서 학도호국단에 지원요청을 해 모인 학생들이 한 200여명이 됐고, 청년들과 잠사공장의 여공들도 함께 포탄을 날랐다. 소양강을 건너 포탄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야 한다고 해서 손수레 등에 실어서 옮겼다."

    박기병 당시 춘천사범학생(6·25 참전언론인회 회장)은 “당시 춘천에 주둔하던 포병 16대대가 춘천사범학교를 포진지로 사용했다”며 “나를 비롯한 학생들이 남춘천역에 있던 탄약고에서 학교 운동장까지 포탄 나르는 것을 도왔다”고 말했다.

    당시 학도병들은 춘천 북방 지내리까지 진출한 적의 포격을 무릅쓰고 우두동에 있던 대대 탄약고에서 수천여발에 달하는 포탄과 기관총 및 소총 탄약을 소양강 이남으로 옮겼다. 그래서 제16포병 대대는 탄약 제한을 받지 않고 적을 격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춘천대첩의 승전보를 울릴 수 있었다.

     

    1950년 6·25 당시 춘천중, 춘천농업, 춘천사범, 춘천여고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참전한 것을 기념해 각 학교내에 세워진 기념탑. ①춘천고 ②춘천농고(강원생명과학고) ③춘천사범(춘천교대) ④춘천여고 (사진=이종혁 기자)
    1950년 6·25 당시 춘천중, 춘천농업, 춘천사범, 춘천여고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참전한 것을 기념해 각 학교내에 세워진 기념탑. ①춘천고 ②춘천농고(강원생명과학고) ③춘천사범(춘천교대) ④춘천여고 (사진=이종혁 기자)

    ▶포탄 나르고 주먹밥 보급⋯“춘천은 학도병 발상지”

    춘천대첩은 낙동강전투,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6·25 전쟁 3대 전투로 꼽힌다. 수많은 전투 가운데 가장 치열했고, 국운을 결정짓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승을 거둔 낙동강전투와 인천상륙작전은 기념관이 마련돼 있지만, 춘천대첩은 기념관은 없다. 2000년 6월 26일 조성된 춘천대첩 기념 공원뿐이다. 특히 춘천대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춘천대첩 기념공원에 있는 기념탑에 500여명의 학도병 명단이 적혀있다. 그러나 학도병의 도시가 된 춘천을 기억하는 아무런 기념물도 없다.  당시 춘천중(당시 6년제) 5학년으로 개전 초기 나흘간 춘천지역 6사단 장병들을 도왔고 그해 10월 북진하면서 학도병으로 또다시 참전했던 유재식(92) 6·25유공자회 서울시지부장(예비역 육군 대령)은 "춘천은 학도병의 발상지"라며 "춘천대첩에서 활약한 학생들의 공헌을 인정하는 기념물을 조성해 춘천 학생들의 호국 의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혁 기자 ljhy0707@mstoday.co.kr

    (확인=한상혁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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