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선의 예감] “모으는 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이 아니다”
  • 스크롤 이동 상태바

    [용호선의 예감] “모으는 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이 아니다”

    • 입력 2022.12.02 00:00
    • 수정 2022.12.03 02:22
    • 기자명 용호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용호선 춘천지혜의숲 시니어아카데미 부원장
    용호선 춘천지혜의숲 시니어아카데미 부원장

    여명을 헤집어 나선 새벽,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다. 실내에 들여놓은 화분에 뿌려주려고 받아놓은 빗물이 꽁꽁 얼어붙었다. 간밤 늦은 시간까지 들이킨 취기 탓에 되레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기분이다. 서화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차강 박기정의 대표작, 그의 서예 글씨로 가슴에 새긴 추수정신(秋水精神·가을의 물처럼 차고 맑은 정신)을 절로 떠올리게 한다.

    사유는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로 이어진다. 추사(秋史) 김정희가 절해고도 제주에 유배,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있던 시절에 그린 그림이다. 격리 생활도 어언 5년을 넘어섰으니 세간의 인심도 이미 멀어졌다. 그런 그에게 애틋한 제자가 있었으니 우선(藕船) 이상적이다. 역관으로 청나라를 오갈 때마다 진귀한 책들을 가져와 스승인 추사에게 전하곤 했다. 그 고마움에 답하고자 붓을 들어 자신의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심사를 발문으로 적었다. 「논어(論語)」 자한 편에 나오는 “한겨울이 와서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쉬이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는 문구다. 

    이 ‘세한도’는 일제강점기 추사 연구에 심취해 있던 일본인 동양 철학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있던 후지즈카 치카시(藤塚鄰)의 수집에 의해 현해탄을 건너갔다. 훗날 이를 쫓아간 서예가 손재형의 집념으로 환국했지만 또다시 곡절을 겪으며 세간을 전전하다가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안겼다. 그야말로 무가지보(無價之寶), 세한도의 최종 소유자였던 수집가의 아들은 “손 아무개 기증으로 해달라”면서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조차 꺼렸다. ‘국민에게 드린다’는 취지였다. 진귀품이 창출된 배경도 그렇지만 국민의 품에 안긴 과정이 또한 감동이다. 작가‧소장자‧수집가‧기증자들의 눈과 손을 타고 넘은 연유도 작품의 가치에 서리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 전시회를 춘천에서 목도한 감동, 온기가 기억에 여전하다. 지난달 23일부터 29일까지 열렸던 ‘강일언론인회(강원일보 출신 언론인 모임) 회원 소장전’이다. 회원들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60여점이 선보인 이번 전시회에는 해강 김규진의 ‘풍죽도(風竹圖)’를 비롯해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위창 오세창, 차강 박기정, 청강(무위당·일속자) 장일순, 화강 박영기, 소헌 박건서, 율곡학회 초대 이사장을 지낸 경양 김진백 선생의 서화 작품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윤길중, 우봉 한상갑, 일붕 서경보 스님의 서예 작품과 장일섭, 이외수, 임근우 등의 작품도 나왔으니 자못 풍성했다. 아울러 회원들과 돈독한 관계인 유용태 강원고미술연합회 고문, 이무상 시인, 최영식 한국화가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서화 작품을 함께 내보여 뜻을 더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작품들에서는 고졸한 멋과 정품을 주고받은 인품, 온정이 풍겼음은 물론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단연 주목받은 청곡 윤길중의 서예 작품 문구 ‘다로정담(茶爐鼎談·찻물을 끓이는 화로의 다리들처럼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음)’처럼 말이다. 

    때마침 ‘이육사기자상’이 제정돼 수상 후보자를 공모한다는 뉴스가 날아들었다. 이육사기자상심사위원회 주관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대구‧경북 출신 전직 언론인들이 주축이 된 이육사기자상 제정위원회가 시선에 들었다. 취지와 정황이 궁금해서 현지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전직 언론인이다. 그에게서 들려온 대답 중에 귀를 쫑긋 세우게 한 말이 여전히 생생하다. “다는 아니지만 부인할 수 없어요. 강일언론인회 활동에서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강원일보 전직 기자들도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그는 강일언론인회의 정기적인 회보 발간, 후배인 현직들에게 수여하는 ‘올해의 기자상’ 시상, 그리고 이번 회원 소장품 전시회까지 낱낱이 꿰고 있었다.

    결국 진정한 가치, 진품‧명품을 알아보는 안목(眼目)이 관건이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의 저자 유홍준이 쓴 책 중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안목」(눌와 刊)이다. 미를 보는 눈, 이 책을 통해 인지하게 되는 것은 ‘높은 안목은 한 개인의 즐거움에만 기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술품 수장가들의 안목이 우리 문화를 지키고 가꿔왔음을 사례와 문헌을 들어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 정조 때 의관이자 서화 애호가였던 석농(石農) 김광국이 편찬한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전 10권)에 붙인 유한준의 발문에 나오는 문구를 가슴에 새기게 된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게 되며, 볼 줄 알면 모으게 되니, 이때 모으는 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이 아니다.”

    유홍준이 전하는 안목은 이래야 한다. “예술을 보는 안목은 높아야 하고, 역사를 보는 안목은 깊어야 하며, 현실 정치‧경제‧사회를 보는 안목은 넓어야 하고, 미래를 보는 안목은 멀어야 한다.”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