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기울어진 저울로 잰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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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의 딴생각] 기울어진 저울로 잰 정의

    • 입력 2021.05.23 00:00
    • 수정 2021.05.25 06:49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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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소비하청(笑比河淸)이란 말이 있다. 사람이 매우 근엄해서 여간해선 웃지 않을 때 쓰는 말이다. 이때 ‘하’는 황토와 뒤섞인 누런 강물로 유명한 중국의 황하(黃河)를 가리킨다. 도무지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을 본다는 건 맑게 흐르는 황하를 보는 것과 같다는 ‘소비하청’ 고사의 주인공은 송나라 때 서릿발 같은 판결로 명성이 높았던 판관 포증(包拯)이다. 포증은 흔히 청천(靑天)이란 호를 붙여 포청천으로 불리었다. 황제의 위세를 업고 설쳐대던 황족들 환관들조차 포청천의 시퍼렇게 날이 선 서슬에 눌려 그를 보면 두 손을 얌전히 모아 고개를 숙였고, 가능하면 그의 눈에 띄지 않도록 피해 다녔다.

    작은 현(縣)에서 현령으로 지낼 때 이미 갖추어져 있던 포청천의 바르고 엄한 품격은 개혁의 실패로 부정부패가 만연한 도성 개봉(開封)에서 확연히 빛을 발했다. 개봉 부윤에 임명되면서 당시 주군이었던 인종으로부터 사형집행에 쓰이던 작두를 받은 포청천은 관청에 북을 매달아 민원을 제기하는 데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하게 했고, 그걸 막는 관리는 용서하지 않았다. 강가의 공유지에 사사로이 지어진 관리의 누각들이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철거되자 백성들은 “청탁이 통하지 않는 건 염라대왕과 포증뿐”이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포청천의 생활은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았고,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친지와 친구들을 멀리했으며, “후손들 가운데 탐관오리가 나온다면 살아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죽어서도 선산에 묘를 쓰지 못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포청천과는 다소 결이 다르지만 청렴하면서도 엄격한 관리의 면모와 개혁정신에 비추면 맨 먼저 떠오르는 조선의 인물은 조광조(趙光祖)다. 그에게 붙어 있는 “너무 곧아서 일찍 스러졌다”는 평가는 그의 엄정한 선비정신과 굽히지 않는 기질을 대변한다. 임금의 허락을 받기 위해 밤이 되어도 물러나지 않은 그였지만 과거(科擧)만으로 세상에 숨은 인재를 등용시킬 수 없다며 현량과(賢良科)를 주장할 정도로 현실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공적을 높여 훈작으로 ‘놀고먹던’ 대신들을 외직으로 돌리고, 나아가 공신 넷 가운데 셋의 공훈을 삭제한 것은 지금이라도 하기 힘든 과감한 개혁이었다. 당대는 그를 서른일곱 한창 나이에 목숨을 내놓게 만들었으나 역사는 그를 개혁가의 맨 앞자리에 세워 기린다.

    이즈음 조광조와 포청천에 어깨를 겯을 만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 사람에 ‘푹 빠져 있다’고 해야 옳을 듯싶다. 수요일과 목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만난다. 그를 만나는 시간을 기다리는 나는 사랑에 빠진 이의 설렘과 기대로 한껏 달뜬다. 양종훈 - 검사출신 로스쿨 형법교수다.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은 ‘소비하청’의 포청천을 빼다 박았다. 날카로움과 엄정함,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결기는 조광조의 그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검사 시절 양종훈은 대기업 회계담당 직원 하나를 횡렴혐의로 기소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가 피고에게 구형한 것은 ‘무죄’였다. 판사가 양종훈에게 묻는다. 무죄라면 기소는 왜 했냐고. 그때 그가 말한다. “횡령한 것은 피고가 아니라 피고의 윗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불법을 피고가 뒤집어쓴 것입니다. 그래서 무죄입니다. 하지만 본 검사가 기소를 하지 않았다면 다른 검사가 기소를 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피고는 어떤 식으로든 벌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양종훈은 현실의 존재가 아니다. ‘로스쿨’을 배경으로 흥미진진하고 의미심장한 얘기들이 펼쳐지는 한 방송사의 수목드라마 주인공이다. 한낱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는 ‘허구의 존재’지만 내가 그로부터 받는 위안은 더없이 크고, 감동은 눈물겹도록 진하다. 현실의 존재는 아니지만 양종훈에게서 나는 정의로운 사람의 표상을 보고, 정의를 찾아가는 사람의 진면을 새삼 확인한다.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에서 정의로운 세상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세상이 정의로웠다면 눈을 가린 채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 디케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시작부터 기울어져 있는 ‘정의의 저울’은 웃음을 잃은 포청천과 마흔 살이 되기 전에 목숨을 잃은 조광조와 허구의 인물인 양종훈 같은 존재에 의해, 그나마 겨우, 아슬아슬하게, ‘평형’을 이룰 수 있을 뿐이다. 희망이란 참으로 실낱과 같다. 그러나 있다.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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