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계약서 쓴 적 한 번도 없어요”...법 사각지대에 놓인 배달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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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로계약서 쓴 적 한 번도 없어요”...법 사각지대에 놓인 배달노동자

    9년째 배달했지만, 근로계약서 작성 전무
    ‘구두계약’으로 퉁치는 대행업체
    배달 기사 사고에는 ‘나몰라라’
    부담되는 보험료, 안전은 뒷전

    • 입력 2024.03.27 00:06
    • 수정 2024.04.16 00:09
    • 기자명 김성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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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일 춘천 효자동 도로에서 한 배달대행업체 소속 기사가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다. (사진=김용진 인턴기자)
    26일 춘천 효자동 도로에서 한 배달대행업체 소속 기사가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다. (사진=김용진 인턴기자)

     

    서울 강북에서 9년동안 배달 기사로 근무한 이모(28)씨는 최근 배달 일을 그만 뒀다.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근로자의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다보니 돈을 덜 벌더라도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다.

    이 씨는 9년동안 배달대행업체 10곳에서 일해왔지만, 근로계약서를 써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개인사업자 지위라 그러려니 생각했는데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 게 근로기준법 위반이라는 사실은 배달 일을 그만 두고서야 알았다.

    그는 “9년간 기사로 일하면서 문서 형태의 ‘계약서’라는 걸 한 번도 구경해본 적이 없다”며 “배달기사도 엄연한 근로자인 만큼 최소한의 권리를 지켜주는 인식이 생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배달플랫폼 종사자 절반 이상이 특정한 계약관계를 맺지 않고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배달기사를 근로자로 인정하는 표준계약서가 마련됐지만, 여전히 법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지난해 한국고용정보원이 발간한 ‘2023년 고용동향 브리프’에 따르면 남성의 41.7%와 여성의 57.4%는 지난해 플랫폼 업체를 이용하면서 ‘어떠한 계약도 맺지 않았다’고 답했다. ‘잘 모르겠다’는 응답도 각각 19.3%, 12.6%로, 사실상 10명 중 6~7명은 특정한 계약관계 없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 근로계약 작성 요구 거절⋯하더라도 구두계약이 대부분

    이씨는 배달 일을 하면서 근로계약서를 쓰자고 업주에게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 씨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구두 형태로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을 들어준다고는 했는데 막상 기사가 사고를 당한 뒤에는 산재보험 처리를 거부했다.

    실제 취재진이 배달대행업체 세 곳에 문의한 결과 근로계약서를 작성해야 하지만 이런 의무를 지키는 경우는 드물었다. 계약을 한다 해도 대부분 구두로 할뿐 문서 형태는 아예 없었다.

    이 씨는 “만약 부상을 당해 병원 진료를 받아야 해도 대행업체가 따로 지급하는 보상은 없다”며 “철저하게 계약서를 작성한다면 기사들의 권익향상에 도움이 될 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사업주가 계약서 작성을 꺼리는 이유는 임금체불이나 부당해고, 산재사고 등의 일이 발생했을 때 노동자의 권리구제에서 유리한 근거로 삼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배달 노동자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것은 엄연히 근로기준법 위반에 해당한다.

    노무사무소 해뜰의 전인원 노무사는 “배달대행업체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거나 구두로라도 근무조건을 고지하지 않았다면 엄연한 불법”이라며 “이 경우 사업주가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구두계약도 법적 효력이 있기 때문에 녹취록을 확보해놓거나 카카오톡·텔레그램 등으로 전송받은 메시지를 증거로 남겨놓는다면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26일 춘천 강원대학교 부근 골목에서 배달 기사가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다. (사진=김용진 인턴기자)
    26일 춘천 강원대학교 부근 골목에서 배달 기사가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다. (사진=김용진 인턴기자)

     

    ▶보험은 사치, 안전은 뒷전

    배달 기사는 보험 가입도 쉽지 않다.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배달기사는 유상운송보험에 가입해야 하는데 보험료가 워낙 비싸 가입을 꺼린다. 오토바이 운전이 주 업무인 배달기사는 사고 확률이 높은 고위험 직군이라 오토바이 보험료 중에서도 가장 비싸게 책정되기 때문이다.

    실제 2023년 기준 연 평균 보험료는 약 224만원으로 자동차보험료(65만~70만원)보다 3배 이상 비싸다. 한 배달기사는 “유상운송보험의 경우 배민이나 쿠팡이츠는 자동으로 가입되지만, 대행업체에서 일하는 경우에는 개인이 직접 보험료를 납부해야 하기에 부담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이 조사한 유상운송보험 가입률은 2022년 기준 40%에 불과하다.

    배달 기사들은 사망, 상해 보험에 대해서도 차별을 받고 있다. 고위험 직군이라 보상이 제한되거나 아예 배제되는 경우가 흔하다. 한 보험사 상담직원은 “사망보장보험의 최대 보장금액이 5억원이라면 기사의 경우에는 절반을 밑도는 2억원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보험사에선 “배달 기사뿐 아니라 오토바이 자체를 타는 사람에게는 상해보험이 아예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성종 서울노동권익센터 쉼터운영위원은 “보험사가 배달 기사들이 가입하려는 상품을 제한하는 행위에 대해 단호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면서도 “우선 오토바이 사고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고, 배달 기사들에 대한 교통안전과 관련된 정기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성권 기자·김용진 인턴기자 ksk@m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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