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윤희순 의사, 춘천만의 의병장 아닌데…이리 예우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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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설] 윤희순 의사, 춘천만의 의병장 아닌데…이리 예우해서야

    • 입력 2024.03.06 00:01
    • 수정 2024.03.08 00:14
    • 기자명 MS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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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희순 의사 초상화.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윤희순 의사 초상화.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3·1절이 또 지났다. 햇수가 어언 105년이다. 곳곳에서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렸다. 일제강점기에 오직 대한독립을 위해 피 흘린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에게 머리 숙여 경의를 표했다. 해마다 3·1절을 맞이하지만, 선열을 대하는 우리 후손들의 자세는 여전히 마뜩잖다. 말은 번지르르 하나, 실상은 헛헛하다. 독립에 몸 바친 투사들을 제대로 예우하고 있다고 당당할 수 없는 까닭이다. 여성 최초 의병장 윤희순 의사도 그런 분 중 한 명이다. 춘천 공지천 의암공원에 한 손에 책을 들고 외치는 윤 의사의 동상이 있다.

     윤 의사는 16세 때 춘천 남면 가정리에 사는 유제원과 결혼했다. 춘천 의병장 유홍석의 맏며느리,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며느리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시해된 사건을 계기로 유홍석이 의병으로 출정하자 의병들에게 음식과 옷을 조달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부녀자들과 군자금을 모아 의병을 지원했다. ‘안사람 의병대’를 조직해 이끌었다. 무기와 탄약을 만들어 공급하는 ‘무기 제조소’도 운영했다. 1910년 일제가 나라를 병탄(倂呑)하자 가족과 함께 중국 만주로 건너가 학교를 설립해 항일인재를 키우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안사람 의병가’ 등 8편의 노래를 짓고 ‘왜놈 대장 보거라’라는 등 경고문 4편을 썼다.

     윤 의사는 일제강점기 당시 말 그대로 붓과 총을 든 여성독립운동가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고애신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한데 MS투데이의 보도에 따르면 윤 의사 유적지는 사실상 방치돼 있다. 가정리의 의적비(義蹟碑)는 기울었고, 옛집은 낡아 보와 기둥이 썩거나 휘어졌다. 흙벽은 갈라지고 흘러내렸다. 묘역을 비롯해 우물과 무기제조소 터도 손길이 닿지 않았다. 윤 의사가 실제 생활한 옛집인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라는 게 춘천시의 입장이다. 아직 관련된 자료와 증언 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정작 옛집으로 확인되면 어떻게 보존할 텐가, 부서진 채로 둘 것인가. 답답하다.

     춘천은 윤 의사의 의병 활동 주 무대였다. 시아버지부터 아들까지 가족 모두가 독립투사들이다. ‘가족 독립군’이 따로 없다. 강원자치도와 춘천시가 윤 의사를 선양(宣揚)해야 하는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윤 의사의 출생지인 경기도 구리는 ‘윤희순 역사 찾기’를, 본적지인 충북 충주는 ‘충북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고 있다. 서경덕 교수와 송혜교 배우는 윤 의사의 영상을 제작해 국내외에 공개했다. 대조적이다. 강원과 춘천은 우선 ‘윤 의사 옛집’으로 지정하기 어려우면 ‘옛집 또는 집터 추정’이라는 명목으로라도 관리에 나서야 한다. 윤 의사의 흔적과 자료를 찾고, 연구하는 일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다시 올 3·1절에는 조국 독립을 위해 몸 받친 윤 의사에게 떳떳한 후손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예의이자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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