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어디서 무얼하다 온 사람들 이었을까?
  • 스크롤 이동 상태바

    그들은 어디서 무얼하다 온 사람들 이었을까?

    • 입력 2023.10.03 00:01
    • 수정 2023.10.04 00:05
    • 기자명 전운성 강원대 명예교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횡단 여행가 전운성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명예교수)
    횡단 여행가 전운성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명예교수)

    풍성한 추석이다. 이러한 계절을 맞아 모처럼 만나는 친지들과 무슨 얘기를 밥상에 올려놓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적지 않은 어르신의 경우 자녀들의 미래를 위한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클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자 또한, 미래의 거울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1960년대 초중고 시절을 춘천에서 보내며 궁금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당시 한국전쟁 이후 춘천과 인근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과 그의 가족들을 눈여겨보았다. 그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지만, 시장 등 여기저기에서 여유 있게 활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을 보면서, 이곳에 오기 전에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컸다. 필경 우리를 위해 온 사람들일 텐데, 분명 그들의 고향은 우리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일 것이란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10년 전인 2013년 6월 주말, 62년 만에 미군으로부터 춘천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캠프페이지 개방식에 참석한다. 이미 2005년 전국 80개 미군기지 가운데 제일 먼저 공식적인 기지 폐쇄식을 거친 후, 환경조사와 토지정화 작업을 마친 뒤 온전히 시민에게 돌아오는 공식행사였다.

    동시에 6·25전쟁 당시 국군이 최초로 승전고를 울린 춘천 대첩 전승 기념행사도 열려 시민들의 환호와 새로운 다짐의 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상징적으로 남겨 두었던 30여m의 미군기지 콘크리트 담벼락을 줄로 묶어 잡아당겨 허무는 퍼포먼스도 진행하였다. 이때 흰 밧줄을 당기는 시민대열에 서서 힘껏 힘을 주어 당기자 담벼락이 우리 앞으로 쓰러지며 잿빛 먼지가 눈 앞을 가리며 사라졌다. 이 먼지의 사라짐은 과거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춘천을 여는 신호탄이었다.

    그런데, 이 미군기지는 6·25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던, 1951년 미군이 소양강 변에 군수품을 하역할 수 있는 활주로를 건설하면서 생겨난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1958년부터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 때 큰 공을 세운 미 육군 중령 존 페이지의 이름을 딴 캠프페이지가 운영되었으니, 거의 내 인생과 함께해 온 절대 짧지 않은 긴 세월이었다.

     

    캠페이지 담장을 무너뜨린 후의 모습. (사진=전운성)
    캠페이지 담장을 무너뜨린 후의 모습. (사진=전운성)

    한편, 별다른 경제기반이 없던 춘천에서 군수용품을 취급하는 상가가 형성되는 등 지역의 기지경제의 역할로 한몫한다. 이는 오늘날 전방지역 지자체의 상권이 군부대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1950-60년대에는 그야말로 모두가 가난과 배고픔을 겪고 있던 어려운 시기였다. 춘천에서 살던 우리 가족 역시 가난과 배고픔으로 하루하루 겨우 버티며 산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세월이 흘러, 우리의 경제 규모가 본격적으로 커지던 1990년대 시절, 대학에 재직하면서 어린 학창시절 곁에서 보았던 미군들의 고향이었던 미국 내의 여러 곳을 탐방한다. 특히, 미국 곳곳에 세워진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가 서 있는 곳을 찾아보며, 어린 학창 시절 춘천에서 보았던 미군들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미국을 일주하면서 150여 개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음도 안다. 그리고 한국전쟁참전기념물을 세우기 위해 새롭게 모금 운동을 하는 지역도 있었다. 이는 그만큼 한국전에 참전한 178만명의 미군 출신지는 전국적이었다.

     

    미국 오클라호머 대학 캠퍼스의 한국참전기념비. (사진=전운성)
    미국 오클라호머 대학 캠퍼스의 한국참전기념비. (사진=전운성)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지 70여 년이 흐르면서 점차 잊힌 전쟁으로 인식되어가고 있던 찰라, 1995년 워싱턴 링컨기념관 아래 한국전쟁 기념공원이 조성되면서 승리한 전쟁으로 재조명받기 시작한다. 오죽했으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게 떳떳이 말하기 힘들 정도라고 했을까. 그들이 도왔던 한국이 세계 유수의 경제 강국으로 등극하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자부심과 보람을 얻고 참전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는 순간 마음이 찡해진다.

    그리고 오클라호마 대학 캠퍼스 한가운데 한반도 모양의 조각된 한국 참전비 앞에 서서 한국에서의 기억을 되살리는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어린 학창시절 궁금했던 그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고 있었으며, 어떤 일을 하다가, 왜 왔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태 및 아프리카 지역의 많은 개발도상국의 개발 협력 사업과 자유여행을 병행하면서 많은 현지의 청소년들을 만난다. 그들 역시 내가 청소년 시절 외국인을 보면서 생각했던 것과 같다는 표정이었다. 즉, 도대체 이 먼 곳까지 오기 전에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먹고, 어떤 환경에서 살다가 왔겠느냐고 궁금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주고 그들 장래의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가능하면 방문국의 학교 교실을 찾아 강의도 하는 등 격의 없는 학생들과 만남을 반겼다.

     

    이디오피아 중학교를 방문해 학생들과 함께 했다. (사진=전운성)
    이디오피아 중학교를 방문해 학생들과 함께 했다. (사진=전운성)

    그 자리에서 우리가 어려웠던 경험을 설명하며, 미래의 자신을 위해서나, 가족을 위해서나 지역과 나라 그리고 인류를 위한 큰일을 할 수 있는 ‘큰 야망을 품어라(boys, be ambitious)’라는 메시지를 전하곤 했다.
    그들이 내 뜻을 충분히 알았다는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들의 밝은 미래를 보는 듯했다. 언젠가 이들 청소년도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가 했듯이 자신들보다 못한 빈곤 국가를 찾아 도와주는 기회가 오길 비는 마음 간절하였다.

    이 풍성한 한가위 아침, 파푸아뉴기니의 가벤시스 마을에서 가난퇴치를 위해 수고했다는 뜻에서 명예 추장으로 추대하면서 감사해하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이러한 사실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가 빈곤 탈출에 성공하여, 그간 도움을 받던 원조수원국에서 도움을 주는 원조공여국으로 바뀐 까닭이다. 자, 여러분의 다복한 한가위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저작권자 © MS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66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