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신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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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신작로

    • 입력 2020.11.01 00:00
    • 수정 2020.12.08 11:02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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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평창 출신 소설가 이효석은 고향을 무대로 한 소설을 모두 세 편 썼다.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은 <메밀꽃 필 무렵>이고 다른 두 편은 <개살구>와 <산협>이다. 이 세 편의 소설을 후대 사람들은 보통 ‘영서삼부작’이라 부른다. <산협>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느 날 산골짜기 봉평을 떠나 오대산 월정사로 가다가 난생처음 신작로(新作路)와 자동차를 보게 된다. 신작로는 말 그대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기존의 우마차가 다니는 길을 새로이 넓게 만든 길이다. 물론 신작로는 일제가 오대산의 자원수탈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든 길이이기도 하다.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도 당연히 신작로로 변했고 이후 오대산의 아름드리나무들이 트럭에 실려 고갯길을 넘게 되었다. 하여튼 소설 속의 인물을 오대산에 갔다가 봉평으로 돌아와 아직 신작로와 자동차를 보지 못한 주변 이들에게 그 소감을 이렇게 얘기한다.

    “크고말고. 신작로가 한없이 곧게 뻗친 위를 우차가 늘어서고 자동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달아나데. 자동차 처음 보고 뜨끔해서 길가에 쓰러졌다네. 돼지같이 새까만 놈이 돼지보다도 빠르게 달아나거든. 우레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 세상이 넓지. 마당 같은 넓은 길을 걷고 있노라면 이 산골로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어져. 어디든지 먼 데로 내빼고 싶으면서.”

    마치 요즘의 고속도로를 묘사하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우차는 당연히 소가 끄는 수레다. 사실 당시에는 자동차보다 우차의 수가 훨씬 많았다. 달구지라고도 하는 우차를 부리는 사람은 달구지꾼 또는 우차꾼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우차를 끌고 대관령을 넘나들면서 오대산의 나무를 실어 날랐다. 이효석의 또 다른 소설 <개살구>는 무대가 오대산 아래 진부인데 소설 속의 한 처녀는 그 우차꾼 총각과 사랑에 빠진다. 그들이 간식을 먹으며 짧은 만남을 갖는 장소는 오대산에서 나와 길이 동서(강릉과 진부)로 갈라지는 월정거리다.  

    소설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던 시대의 풍경이다. 같은 평창이니 우리 조부모도 당시 소설의 주인공이 걸었던 신작로를 걸었을 것이다. 나무를 싣고 가는 우마차들과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자동차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을 게 틀림없다. 더군다나 조부모의 집은 월정거리에서 대관령으로 가는 신작로 옆에 있었으니 신작로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모두 보았을 것이다. 아버지도 그 집에서 자라다가 결혼을 하면서 인근 신작로 근처로 분가했으니 어린 시절을 같은 신작로에서 놀았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세월이 흘러도 그 신작로는 사라지지 않고 내게까지 내려왔다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도 사람들은 마을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그 길을 신작로라고 불렀다. 물론 비포장도로였다. 신작로 주변에는 송방(가겟방)과 담배 가게가 있었다. 그 앞은 버스정류장이었다. 신작로는 찻길이기도 했지만 인도의 역할도 같이 했다. 어디인가로 가려하면 가장 빠른 길이 신작로였다.

    신작로는 울퉁불퉁했고 돌멩이가 많았다. 비가 내리면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겨났다. 가로수는 이태리포플러였는데 가을바람이 불면 나뭇잎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다 겨울이 되면 대관령의 폭설을 피하지 못하고 흰 눈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임에도 신작로의 다져진 눈은 겨울 내내 녹지 않았다. 어린 시절 어쩌면 나는 마을의 신작로를 걷거나 완행버스를 타고 20리 떨어진 진부의 중학교를 오가며 조금씩 집 밖의 세계를 알아갔던 것 같다.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디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곤 했던 것이다.
     
    초등학생이 되기 전 내 소원은 엄마를 따라 완행버스를 타고 진부장에 가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버스정류장까지 따라가서 울고불고 매달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꽁지에 흙먼지를 달고 온 버스가 도착해 문이 열렸지만 결국 나만 홀로 정류장에 남아 눈물을 닦아야만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신작로 옆에 앉아 돌멩이를 던지며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자동차가 시야에 들어오면 지나가면 자리에서 일어나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았다. 어떨 때는 쫓아가 보기도 했지만 입과 코로 흙먼지만 실컷 들이키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신작로에는 늘 보던 마을사람들만 다니는 길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초등학생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신작로를 걸어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등하교 길에 가끔 만나게 되는 직행버스에는 더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버스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우리를 바라보거나 긴 여행에 피곤한지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그리고 우리들은 신작로 옆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의 꿀을 빨아먹는 왕벌을 잡다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곤 했다. 한번은 놀랍게도 답례로 손을 흔들어주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주 짧은 만남임에도 나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신작로에 멈춰 선 나는 멀어져가는 직행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저 아이는 어디에서 버스를 타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생각하며.

    사실 그때는 가난했던 시절이라 마을사람들은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녔다. 심지어 진부장에도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을의 버스정류장에서 놀다가 그들을 몰래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신작로는 산골마을의 아이들에게는 영화관과 같은 곳이었다. 신작로는 집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 지나가는 곳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들의 놀이터는 버스정류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구슬치기를 하던 우리들은 아랫마을에서 걸어오는 낯선 사람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갓을 쓰고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옷도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걸쳤는데 전체적으로 남루한 차림새였다. 등에 주루목을 멘 그는 혼자서 중얼중얼 말을 하며 걷고 있어서 호기심은 점점 더해만 갔다. 마치 옛날이야기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신작로를 걷는 것만 같았다. 그는 우리 코흘리개들이 일제히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걸어갔다. 그날 저녁 집에 들어가 그 사람 얘기를 하자 엄마는 누구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위 원복(오지 중의 오지마을이다)이란 산골짜기에서 서당훈장을 하던 이인데 어려서부터 한문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그만 정신이 조금 이상해졌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걸어가면서도 사서삼경을 암송한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이불 속에 누워 저 옛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 사람을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어떤 날은 신작로로 꽃상여가 지나가기도 했다. 펄럭이는 깃발들, 상여를 지고 가는 상여꾼들, 삼베옷을 입고 곡을 하며 상여를 뒤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구슬픈 상엿소리가 피어났다. 꽃으로 치장한 상여였지만 볼 때마다 무서웠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을 했다. 사람이 죽으면 상여를 타고 산으로 가서 흙속에 파묻힌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만하면 신작로로 상여가 지나갔다. 상여가 지나간 날 밤은 늘 악몽을 꾸느라 진땀을 흘렸다.
      
    신작로에도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왔다. 대관령의 겨울은 길고 혹독했다. 춥고 폭설이 자주 내렸다. 온 마을이 눈으로 덮이고 그 눈이 미처 녹기도 전에 또 눈이 내렸다. 신작로도 다르지 않았다. 제설차가 가끔 지나가기는 하지만 눈 위의 눈을 밀고 갈 뿐이었다. 눈으로 단단해진 신작로에 모래만 드문드문 뿌리는 게 전부인데 그래도 자동차들은 아무렇지 않게 눈길을 달려갔다. 폭설이 그친 어느 날 우리들은 정류장에서 눈싸움을 하며 놀다가 굉음을 토해내며 신작로를 달려오는 이상한 차(스노모빌)를 발견했다. 그 차가 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재 너머 스키장에 온 서울사람이 몰고 온 차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당시 왠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스키장에 오는 사람들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 감정이 사건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신작로를 달려오는 스노모빌을 향해 일제히 팔뚝질을 하곤 경사가 급한 비탈 밭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내 망했다.

    스노모빌은 못 가는 곳이 없었다. 신작로를 벗어나 비탈 밭 꼭대기까지 아무렇지 않게 올라왔고 우리들은 모조리 잡혔다. 그 다음 상황은 말하고 싶지 않다.

    어린 시절 신작로는 아직 가보지 못한 세상을 우리들에게 보여준 거대한 스크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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