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은 가을도 봄’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춘천은 사계절 푸른 봄인 청춘이 넘쳐나고, 서울로 내달리는 기차에도 청춘이란 이름을 붙였다. 세상 푸른 오월이 오면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신록예찬」(이양하)이 어느새 떠올려진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오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신록을 예찬할 만한 대상지로 여럿 있겠지만, 춘천에서 한곳을 고르라면 단연코 청평산을 꼽을 것이다. 청평산은 고려 때 거족 문신이었던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이 은거했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자현은 고려 왕실의 최고 외척 세력으로 당대를 손아귀에 쥔 가문에서 태어나 관직이 높이 올랐으나, 부귀공명을 내던지고 37년간 이곳에 거처하며 생을 마감했다. 이자현이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으로 바꾸고 기거하자 도둑은 없어지고 호랑이와 같은 사나운 짐승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눈이 부시도록 맑고 깨끗하여 더없이 평화롭다’란 뜻을 지닌 청평산(淸平山)으로 부르게 되었고 이자현은 청평거사로 통하였다.
이자현의 은거 이전에 청평산은 경운산(慶雲山)으로 불렸지만, 조선조에 들어서는 줄곧 청평산으로 통용되었다. 조선 중기에 보우 스님이 문수원을 대대적으로 중창하여 청평산 청평사로 중창 불사했다. 고려 시대 김부철이 짓고 탄연이 쓴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비가 세워졌고, 명문거족의 일원이자 송설체의 대부 이암(李嵒)이 문수원에 머물며 쓴 문수원장경비문을 세웠으며, 선승 나옹화상도 머물며 오도송(悟道頌)을 영지(影池) 곁 바위에 새겨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조선 시대 매월당 김시습은 청평산 선동에 머물며 청평산의 아름다움을 시로 담아냈으며 이후 내로라하는 시인 묵객이 수없이 드나들며 수천 수의 시와 글을 남기어 명실상부한 춘천의 대표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여기에 이자현-이암-김시습으로 이어지는 다문화 또한 지금 다례문화제(茶禮文化祭)로 계승되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청평산 입구에서 청평사에 이르는 계곡에 아기자기한 청평 10경이 있고, 청평사를 지나 서천으로 시작하는 선동 계곡은 동양 최고(最古)의 원림(園林)으로 산수 문화의 정수를 이룬다. 그중에 영지(影池)를 중심으로 하는 고려 정원은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사이호사(西芳寺)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년 정도 앞서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동 끝에 이르면 청평산 대표 비움과 쉼의 공간인 청평식암(淸平息庵)과 만나게 된다. 식암은 청평거사 이자현이 37년간 거처한 공간으로, 집 모양이 새의 알과 같았으며 무릎을 굽혀야만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식암은 주거 공간이자 수련 공간이었으며 청빈한 가운데 참 즐거움을 알았던 진락공(眞樂公)의 쉼터였다.
5월은 풋풋함이 최고조에 이르는 계절이다. 그 풋풋함을 만끽하며 세상의 욕심과 잡념을 비울 수 있는 청평산이야말로 현대인의 지친 삶을 위로받을 대표 공간이다.
불행하게도 청평산은 제 이름을 잃고 오봉산으로 불리고 있다. 1960년대 초 정상이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졌다는 근거에 의해 오봉산으로 등재되는 비운을 맞았다. 조선 시대 문헌에 근거하면 청평산은 부용봉, 향로봉, 경운봉 세 봉우리만 이름이 있을 뿐이다. 특히 부용봉은 영지에 비치는 봉우리로 옛 시인의 시와 글에 수없이 등장하며 유명세가 있었고, 향로봉과 경운봉 또한 여러 유산기에 등장하고 청평산과 의미가 연결된다. 하루라도 빨리 근거 없는 오봉산의 이름을 걷어내고 청평산 이름을 되찾아 지역 정체성 확립에 보탬이 되기를 기원한다.
■ 허준구 필진 소개
-전 춘천학연구소장
-강원도 지명위원회 위원
-춘천시 교육도시위원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