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성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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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성탄제

    • 입력 2021.12.08 00:00
    • 수정 2021.12.08 00:06
    • 기자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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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1926-2017)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성탄제」 「황사현상」 「하회에서」 외 다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고려대 영문과 명예교수로 계시다 타계

    이영춘 시인
    이영춘 시인

    겨울이 오면 나는 왜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것일까? 특히 ‘그믐날’ 밤이면 더욱 선명히 떠오르는 아버지, 얼큰하게 막걸리 한 잔 걸치시고 고등어 한 손 사 들고 휘청휘청 논두렁길을 휘돌아 들어오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지금 그립다. 

    어느 해였던가? 그리고 내가 몇 살 때였던가? 솜털 같이 어린 내 몸에서 하얗게 열꽃이 피었단다. 그 어린 아이는 하얗게 눈을 부릅뜨고 경기(驚氣)를 하였단다. 그러자 아버지는 자신의 손가락을 칼로 베어 피를 내서 내 입속에 흘려 넣으셨다는 나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이 겨울밤, 빨간 산수유 열매 같은 얼굴로 나를 찾아오신다. 

    이 시의 화자도 어리던 날 몹시 심하게 고열이 났었나 보다. 약국도 병원도 없던 시절,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눈을 헤치고/붉은 산수유 열매를 따 가지고 돌아오셨다” 어린 목숨이 할머니와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으로 살아난 것을 하나의 거룩한 탄생, 즉 ‘성탄(聖誕)’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특히 화자는 “붉은 산수유 열매”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환유하여 그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형상화한 절정은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젊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에/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어”주시던 그 사랑이 한없이 그리운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어느새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어” “서러운 서른 살”이 되어 “불현듯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을” 그리워하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가 찡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 시에서 유일하게 ‘어머니’에 대한 암시가 전무하다. 2005년 발간된 시인의 저서 「시와 삶 사이에서-김종길 시론집」에 수록한 「성탄제」에 대하여 작자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태어난 지 2년 반 만에 스물셋의 젊은 나이로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 년 뒤 나는 감기 뒤의 폐렴으로 한 달 이상을 몹시 앓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불안 속에서 몸과 마음을 움츠리고 살아온 지도 벌써 2년이다. 그리고 올해도 어느새 12월이다.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이 지상을 떠나신 아버지는 저 먼 창공에서 돌아올 길조차 잃고 아득한 명왕성이 되셨으리라.

    “눈 속에서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 같은 아버지의 사랑은 아직도 우리들 “혈액 속에 녹아 흐르고 있는데···” 내 입속에 흘려 넣어주신 핏방울은 아직도 내 몸속에서 녹아 흐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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