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가을이 깊어 나이 듦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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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의 딴생각] 가을이 깊어 나이 듦을 생각하다

    • 입력 2021.10.24 00:00
    • 수정 2021.10.24 13:11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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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옛 중국 주(周) 왕조의 기틀을 세운 주공(周公)은 한 나라의 국왕이 될 자질에 대해 유난히 고민을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夏)의 우왕(禹王)과 은(殷)의 탕왕(湯王), 그리고 아버지 문왕(文王)과 형인 무왕(武王)까지, 네 명의 성왕(聖王)이 펼친 도(道)에 입각한 정치를 위해 밤낮으로 궁리했다. 오랜 번민과 고심 끝에 드디어 한밤중에 방법을 찾아낸 그는 이튿날 아침 당장 그 방법을 실행하기 위해 잠자리에 들지 않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습격하듯 가을이 오고 며칠을 지내고 보니 며칠 전까지 목덜미를 덥히던 열기가 까마득한 옛일처럼 기억에서 사라졌다. 며칠 지나 다시 또 예전의 기온을 회복하면 어떤 생각이 들지 모르겠으나 아무리 더워진다 해도 더 이상은 가을을 양보할 수 없으리라 싶다. 몸이란 참 간사하지만, 간사한 것으로 치면 마음이 더하다. 덥고 춥고를 느끼는 건 분명 몸이지만, 그 배후에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몸은 더워지면 땀을 흘리고 추워지면 후들후들 떨어대면 그만인데, 투덜거리고 짜증내고 참고 버티고 하는 건 마음의 일이기 때문이다. 시절의 급한 변화에 속절없이 변하는 게 마음이라면, 주공의 저 도저하고 심오한 세계는, 그 세계를 이루는 그의 마음은, 그저 한낱 ‘닿을 수 없는’ 무엇에 불과하다. 공자가 왜 그토록 주나라를 절절히 사모했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가는 일이다.

    주나라 얘기로 시작해서 그런가, 범상하기 짝이 없는 나로서는 감히 흉내조차 내기 힘든 중국인 한 사람이 떠오른다. 우리와 동시대 사람이고, 엄밀히 얘기하면 홍콩사람이다. 그는 “내 돈이 아니다. 잠시 맡아놨을 뿐, 돌려주는 게 맞다”면서 전 재산의 99%, 우리 돈으로 8천억 원을 사회에 환원한 사람이다. 영화배우라고 힌트를 주면, 고개를 끄덕일 분들이 많을 듯싶다. 바로 몇 년 전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화제를 불러 모았던 홍콩의 개념배우 주윤발이다. 그가 대중교통을 이용한 건 아주 오래된 얘기고, 재산의 사회 환원 약속도 오래 전에 이미 공언한 바 있었지만, 당시 그가 다시 부각된 건, 그가 가는 길과는 정반대로 가는 ‘부자 셀럽’들이 너무 많아서였을 것이다.

    주윤발(周潤發)이라는 이름을 톺아보면 말 그대로 이름과 실재가 같은, ‘명실이 상부’한다. 周는 賙와 같은 글자로 “어려운 사람을 물질적으로 구제/구조/원조하다”라는 뜻이다. 周濟窮人(주제궁인)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다”는 말이다. 가운데 이름 潤은 ‘윤택할 윤’이다. 이 글자에는 ‘부드러움/유순함’이란 뜻도 들어 있다. 주윤발의 품행과 성정이 이 글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지막 이름자 發은 ‘필 발’로 ‘베풀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중국의 고대사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아버지 문왕의 유지를 받들어 상(商)나라의 폐덕한 군주 주왕(紂王)을 폐하고 주나라를 세웠던 무왕의 이름이 발(發)이었다. 이러고 보면 주윤발이란 이름의 세 글자가 신기하게도 그 사람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어릴 때는 교훈이 되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읽는 것들 또한 대부분 교훈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교훈(적 이야기)’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고, 괜히 반감을 가지게 되고, 마침내 뒤엎고 부정하고 외면하게 된다. 이럴 때 흔히 쓰는 표현이 ‘머리가 커졌다’는 건데, 머리만 커진 게 아니라 몸도 커져서 외형은 영락없는 ‘어른’이 된다. 어쩌면 이때부터 진짜 어른이 되는 걸지도 모른다. 대개 이대로 굳어져 어른의 세계로 건너가게 된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아야 옳다. 그렇게 어른이 된 자들은 질문이 사라진 세계, 교훈을 적대시하는 세계, 순수를 욕망으로 치환한 세계, 모든 판단의 기준을 자기 자신으로 국한하는 세계, 그래서 타인이 비집고 들어올 수 없는 세계, 양보와 반성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지워버린 세계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주공도, 주윤발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 가을이 깊이 당도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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