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종이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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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종이 탑

    • 입력 2021.08.04 00:00
    • 수정 2021.08.04 17:20
    • 기자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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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 탑

                                  권정남

    새벽 골목길
    종이 탑이 흔들리며 간다

    손수레 위에 힘겹게 쌓아 올린
    신문지와 헌책, 종이박스들
    무너질 듯 끌려가는 공든 탑이
    돌탑보다 단단하고 성스럽다

    굽은 허리에 모자 눌러 쓴
    키 작은 노인 얼굴이 없다
    전사(戰士)처럼 세찬 바람을 뚫고
    전봇대 지나 슈퍼 앞을 돌고 나면
    거룩한 탑은 한 칸씩 올라간다

    무한시공을 끌고 가는 저 수행자
    아침을 깨우고 세상을 거울처럼 닦으며
    부처처럼 정중히 탑신을 모시고
    타박타박 
    빙판길 성지를 순례하고 있다.

    *권정남:1987『시와 의식』등단.*시집『속초바람』,『 연초록 물음표』외 다수. 전,속초문인협회회장.

    이영춘 시인
    이영춘 시인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따뜻하다. 이 시는 수레를 끌며 노동을 하는 노인을 신선한 이미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화자는 아마 새벽 미사나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새벽 골목길에서 노인이 끌고 가는 폐휴지 수거 수레에 마음이 머문다. 그 마음은 노동을 하는 노인을 신선하고 성스럽게 바라보는 마음이다. 노동을 성스럽게 바라보는 그 정서는 노동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인식의 부여다.

    “손수레 위에 힘겹게 쌓아 올린/신문지와 헌책, 종이박스들”, 얼마나 무겁게 쌓아 올렸는지 “굽은 허리에 모자 눌러 쓴/키 작은 노인 얼굴이 없다”고 묘사한다. 몸도 얼굴도 안 보일 정도로 높이 쌓아올린 폐휴지와 박스더미에 눌린 모습이다. 사실은 안쓰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화자는 “무너질 듯 끌려가는 공든 탑이/돌탑보다 단단하고 성스럽다”고 이미지화 한다.
     
    노동을 하는 노인을 구차하게 바라보지 않고 성스럽게 인식하는 심상이다. 궂은 노동을 하는 이에 대한 거룩한 찬미일 것이다. “전사(戰士)처럼 세찬 바람을 뚫고” 세상 풍파를 헤쳐 나가는 노인에 대한 찬사, 바로 그 인식이다. 

    사실 그 노인의 노동은 생계를 위한 몸부림이다. 힘겹게 한 수레를 끌고 가 팔아도 겨우 2천원에서 3-4천 원 받는다는 말을 오래전에 들었던 적이 있다. 몇 푼 안 되는 돈이나마 그렇게라도 벌어야 하는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들의 속사정은 무엇일까?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는 분도 있을 것이고 부모가 버리고 떠난 손자를 혼자 키워야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들의 이면(裏面)은 아프다. 골목길은 물론, 때로는 겨울 빙판길과 언덕길을 오르내리다가 무게에 눌려 굴러서 다치는 이도 있다. 또 때로는 파란 신호를 미처 다 건너지 못해 빵빵 대는 클랙슨 소리에 허둥대는 노인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분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혹은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새벽부터 거리로 나오는 것이다. “새벽 골목길”에 나온 노인은 어느 새 “전봇대 지나 슈퍼 앞을 돌고 나면/거룩한 탑은 한 칸씩 올라가”지만 사실 그들의 삶은 고달프고 아프다. 
     
    오늘 이 아침에도 “무한시공을 끌고 가는 저 수행자/아침을 깨우고 세상을 거울처럼 닦으며” 수행하듯 오르막길을 오르내리는 노인들이 있다. 그런 분들에게 우리는 좀 더 따뜻한 마음과 시선을 보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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