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항어(餘項魚·열목어). 강릉의 것이 가장 크고 맛도 좋다.”

[도문대작] 50. 오대산 금강연의 열목어 구경하기

2024-11-02     김풍기 강원대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사실 열목어는 그리 맛있는 어종은 아니었지만, 조선 시대에도 귀한 생선으로 인식되었던 탓인지 주로 강원도 지역에서 궁궐로 올리는 공물 목록에 들어있었다. 심지어 영조실록에는 강원도 정선군수 이기항(李箕恒)을 비롯하여 횡성 현감(橫城縣監) 이여익(李汝益), 인제 현감(麟蹄縣監) 조진세(趙鎭世), 홍천 현감(洪川縣監) 최상복(崔尙復) 등이 열목어 진상을 기한에 맞추어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영조가 그냥 주의만 주라고 명령하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귀한 생선에 대한 뒷이야기는 늘 떠돌았던 모양이다. 그랬던 영조가 건강 때문에 보양식 이야기가 나왔을 때 열목어를 별로 먹지 않는다고 하자 서명균(徐命均, 1680~1745)이 맛없는 생선이라서 그럴 것이라고 아뢰는 대목이 나온다.

열목어는 맑고 깨끗한 계곡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다. 1급수 청정계곡에서만 서식하는 열목어는 글자대로 해석하면 눈에서 열이 나는 물고기라는 뜻을 가진다. 당연히 눈에서 열이 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차가운 물에서만 서식하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열이 많은 어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원래는 우리말 이름이 있었을 터인데 후에 기록으로 남게 되면서 열목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열목어라는 이름보다 여항어(餘項魚)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항(項)’이 ‘목’이라는 뜻이니, 열목어와 같은 발음의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음차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잘 알려진 서유구(徐有榘, 1764~1845)도 이 물고기를 여항어라고 쓴 뒤 한글로 ‘연목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허균 역시 ‘도문대작’에서 열목어를 하나의 항목으로 설정했다. 그의 서술은 이러하다. “여항어(餘項魚). 산골 마을이라면 어디나 있는데, 강릉의 것이 가장 크고 맛도 좋다.”
40여 년 전만 해도 강원도 산골에서는 어디서나 열목어를 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산골의 차가운 계곡에서는 열목어가 대부분 서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 시대 지리지를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이전 문인들에게 열목어는 대체로 강원도 깊은 계곡에서 맛볼 수 있는 별미로 인식되었다. 허균 역시 전국 여러 곳의 열목어를 맛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강릉 지역의 열목어를 최고로 지목했다. 그가 20대 초반 임진왜란을 맞아 강릉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맛본 열목어가 아니었을까. 그때가 아니더라도 그는 수시로 강릉을 찾아가서 머물곤 했는데, 강릉 열목어가 인상적으로 그의 미각에 각인되었던 모양이다.

 

조선 시대에는 열목어라는 이름보다 여항어(餘項魚)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이 임진왜란을 피해서 강릉에 머물 때 거처는 지금의 강릉시 사천면에 있는 애일당(愛日堂)이었다. 피난길에서 갓난아기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강릉에 도착한 그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애일당을 깨끗이 정리하고 노모와 함께 이곳에서 힘든 시절을 보낸다. 앞으로는 동해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뒤쪽으로는 소금강으로 알려진 오대산 줄기가 만든 청학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당연히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었을 터인데, 아쉽게도 그의 문집에서 이와 관련된 더 이상의 정보를 찾기는 어렵다.

조선 시대 문인들이 남긴 열목어 기록을 살피노라면 오대산 계곡이 자주 등장한다. 월정사 앞으로는 큰물이 흐르면서 남긴 깊은 소(沼)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금강연(金剛淵)이다. 이곳에는 유난히 열목어가 많았는지, 조선 시대 문인들의 글에 여기서 만난 열목어를 인상적으로 묘사한 경우가 자주 보인다. ‘어우야담’을 쓴 조선 중기 문인인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감파(紺坡) 최유해(崔有海, 1587~1641)가 금강산 유람을 하고 남긴 글의 제발(題跋)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금강담(金剛潭)은 강릉(江陵) 대관령 서쪽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 아래에 있다. 높이 백 척에 둘레 수십 척 되는 푸른 전나무가 5, 6리에 걸쳐 서 있고, 10묘나 되는 못은 깊이가 한 길이 넘는다. 수십 척 되는 폭포가 날려서 못에 물을 쏟아내는데, 여항어(餘項魚) 수백 마리가 그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매년 봄 3월 복숭아꽃이 필 때면 물고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튀어 올라 못 위로 올라간다. 팔딱팔딱 뛰는 물고기들이 계속 이어져 어떤 놈은 못 위를 지나치기도 하고 어떤 놈은 미치지 못하기도 하는데 모두 활기차게 앞을 다투니 참으로 제일 기이한 경관이라 하겠다.”(유몽인, 어우집 권6)

 

열목어 (熱目魚, Brachymystax lenok tsinlingensis )는 연어목 연어과의 민물고기이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요즘은 금강연이 내려 보이는 곳에 아름다운 찻집이 있어서, 데크 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주변 풍광을 즐기면서 차를 한잔하는 여유를 누려볼 수가 있다. 금강연은 오대산 월정사를 찾는 시인 묵객이나 관료들을 위한 잔치 자리로 주목을 받았는데, 이런 연유 때문에 이곳의 명물인 열목어 역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너럭바위에 앉으면 오대산의 수려한 계곡과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도열해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조선의 양반이나 관료들이 오대산을 즐기는 하나의 풍경 감상 포인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여기서 지은 시문이 제법 전하고 있다.

허균이 열목어를 조리했던 방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문인들의 기록을 통해서 회로 먹거나 구워서 방풍나물, 고사리와 같은 봄나물이나 버섯 등과 함께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말처럼 열목어는 전국의 맑은 계곡에서는 늘 발견되는 것이지만 강릉에서 잡히는 것이 크고 맛이 있었다. 오대산 금강연이 열목어로 이름났지만,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나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기록에서는 춘천 인근에서도 제법 잡혔다. 강원도의 청정자연은 그렇게 열목어를 길러냈고, 조선의 선비들은 그것을 맛보면서 이곳의 산수를 완상하면서 유람을 했다.

환경 변화 때문에 지금이야 맛보기 어려운 생선이 되었지만, 언젠가는 청정계곡에서 열목어가 쉽게 발견되는 때를 기다려본다. 인간의 욕망이 자연을 바꾸었고, 열목어는 영문도 모른 채 급격히 개체 수를 줄여갔다. 어렸을 때 맛보았던 열목어의 밍밍한 맛이, 지금 생각해보니 담박함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허균의 기억 속에서는 어떤 맛일지 궁금하긴 하지만, 적어도 강원도에서의 삶이 스며있어서 오래도록 생각나는 맛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