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증언으로 보는 근현대 춘천 이야기] 춘천 신사 건립과 춘천이궁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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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과 증언으로 보는 근현대 춘천 이야기] 춘천 신사 건립과 춘천이궁 해체 

    • 입력 2023.06.01 00:00
    • 수정 2023.06.06 08:57
    • 기자명 허준구 춘천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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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준구 춘천학연구소장
    허준구 춘천학연구소장

    신사(神社)는 ‘일본에서, 일본 왕실의 조상 또는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을 총칭하여 부르는 말로 8만8000곳(2010년 기준)에 건립됐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에 신사 건립은 일제 침략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일제는 조선을 침략하고 수탈을 위해서 일본 천황 숭배와 조선은 일본과 하나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각인시키고자 전국에 1141개나 되는 크고 작은 신사를 세웠다. 강원도 수부 도시인 춘천도 신사 건립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춘천신사’는 1913년 일본인이 봉의산 자락에 작은 사당을 짓고 대신궁이라 부른 것에서 시작된다. 일제는 1915년 신사사원규칙을 발포하여 강점 이전 창건된 신사들을 통제 관리하려 하였고, 이 규칙에 따라 1916년 조선인으로 구성한 춘천신사 창립허가 신청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했으나 신청한 신사의 건물 규모가 작아서 내규 위반으로 허가가 나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창립협의회를 개최하여 설립위원을 위촉하고 서하면 방동리 보안림 내 적송(赤松) 150그루를 신OO으로부터 기부받아, 1918년 ‘춘천신사’ 창립허가를 받아 1919년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합사하여 건립했다.

     

    우두산과 조양루 모습을 담은 일제강점기 엽서. (사진=연제철 소장)
    우두산과 조양루 모습을 담은 일제강점기 엽서. (사진=연제철 소장)

    ‘춘천신사’는 봉의산 건립에 앞서 우두산 건립이 추진됐다. 1926년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우두산 정상에 있는 분묘 주인이 일본 신(神) 중의 한 명이자 단군왕검과 동일 신으로 우두산에 내려온 ‘스사노오’이거나 ‘스사노오’의 아들 ‘소슬’이라 주장하는 일본인들에 의해 앞서 추진됐다. 춘천 우두산은 지역민에게 고대부터 존숭과 경외의 대상으로 천제(天祭)가 행해지던 곳이라 천제(天帝) 묘로 인식되거나 치병(治病)과 소원을 이루어주는 영험한 장소로 인식됐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에도 지역민의 이야기를 인용해 청조(淸祖)의 무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 고고학자 세키노가 조사하고 펴낸 보고서에는 우두산 정상에 있는 분묘는 무덤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일제강점기 강원신사의 모습을 담은 엽서 일부. (사진=연제철 소장)
    일제강점기 강원신사의 모습을 담은 엽서 일부. (사진=연제철 소장)

    춘천신사는 1936년 강원도에서 신찬폐백료를 공진 받는 도공진사로 지정되고 1938년 강원신사로 개명한다. 조선총독부는 우두산에 스사노오 분묘는 없지만 스사노오 유적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스사노오 신체(神體)를 우두산에서 발굴하여 1937년 신사에 합사했다. 조선에 세워진 신사는 예외 없이 일본에서 신체를 발굴하여 합사했다. 강원신사는 조선 내에서 신체를 발굴하여 합사한 첫 사례이자 한옥 형태로 개축한 유일한 신사였다.

    춘천이궁의 바깥문인 조양루는 느닷없이 1938년 우두산으로 이전됐다. 1940년 개조된 강원신사 대문은 춘천이궁의 위봉문과 형식이 같은 솟을대문으로 지어졌다. 춘천이궁 본전인 ‘문소각’은 1940년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됐으며 이듬해 1941년 10월 1일 강원신사는 전국 최대 규모로 개조하여 국폐소사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 강원신사 지붕과 출입문. (사진=출처 연대 미상)
    일제강점기 강원신사 지붕과 출입문. (사진=출처 연대 미상)

    왕궁 바깥문 조양루는 일본 신을 호위하는 장치물이 되어 우두산으로 옮겨졌고, 왕궁 문소각은 화재로 소실됐다. 한편 강원신사는 위봉문을 닮은 솟을대문과 문소각 형태의 한옥으로 개조돼 단군왕검을 모시는 사당처럼 위장됐다. 이는 내선일체를 공고히 하고자 한 일제의 치밀한 계획이었다. 봉의산에 춘천이궁은 사라지고 신사 건립이 이루어지면서 춘천은 일제강점기 암흑기로 접어들게 됐다. 이는 역설적으로 춘천이궁 복원이 절실한 이유이기도 하다.

    ■허준구 필진 소개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 소장
    -춘천시 문화도시 정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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