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감언이설] 육림의 추억
  • 스크롤 이동 상태바

    [김형석의 감언이설] 육림의 추억

    • 입력 2023.05.25 00:00
    • 수정 2023.12.07 14:55
    • 기자명 김형석 춘천영화제 운영위원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형석 춘천영화제 운영위원장.
    김형석 춘천영화제 운영위원장.

    일상의 루틴 중 하나는 점심 식사 후 산책이다. 도시락을 먹은 후 명동에 있는 사무실 문을 나서서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어떤 날은 중앙시장을 거쳐 춘천세무서까지 가기도 하고, 시청을 거쳐 교동 쪽으로 향할 때도 있다. 그렇게 매일 30~40분을 걸으며 주변을 구경하는 건 춘천이라는 공간에 친숙해지기 위한 일종의 ‘아이스 브레이킹’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춘천이라는 도시를 오갔다고는 해도, 춘천엔 여전히 나에게 낯선 곳들이 많기 때문이다. 

    며칠 전이었다. 평소엔 잘 걷지 않던 쪽으로 코스를 정했다. 육림고개 쪽이었다. M백화점 쪽에서 걸어 올라가다 도로변으로 내려갔다. 그곳엔 육림극장이 있다. 지금은 가끔 아웃렛 매장 정도로 이용되는 빈 건물이지만, 이곳은 한때 춘천시민들에게 수많은 추억을 안겨주었던 공간이었다.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다. 2021년 세상을 떠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이 영화업계에 뛰어들었을 때, 그는 강원 지역 배급권을 장악하고 있던 육림영화사와 손을 잡았다.

    의정부에 기반을 둔 이태원 사장이 경기도 지역을, 육림극장을 중심으로 한 육림영화사가 강원도 지역을 맡아 이른바 ‘경강권’의 영화 배급을 맡았던 곳이 육림영화사이다. 이후 이태원 사장은 영화 제작에 뛰어들어 임권택 감독의 걸작들을 만들었으니, ‘장군의 아들’(1993)이나 ‘서편제’(1993) 같은 작품엔 육림영화사의 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런 영광스러운 과거를 떠올리면, 지금의 육림극장 모습은 더욱 안쓰럽다. 하지만 이건 이 극장만의 운명은 아니다. 폐관의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원주 아카데미극장은 단관극장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상영관으로 한동안 닫혀 있다가 2020년에 재개관했다. 하지만 지금 원주시의회는 그곳을 허물고 주차장과 야외 공연장을 짓겠다고 결정했다.

    이처럼 오래된 극장이 사라지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현실적 운영의 곤란함이다. 춘천에서 육림극장만 없어진 게 아니다. 육림극장과 함께 극장가를 형성했던 구도심의 향토 극장들이, 멀티플렉스 시대의 개막과 함께 사라졌다. 피카디리극장을 비롯해 아카데미극장과 중앙시장 근처의 중앙극장과 브로드웨이극장이 그렇게 영사기를 멈추었고 지금은 오래된 간판이나 그 자리만으로 존재한다. 재개관까지 했던 원주의 아카데미극장도 ‘혈세 낭비’라는 정치적 구호 속에서 비효율적인 공간이 되어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아웃렛 등으로 사용되는 옛 육림극장 모습. 
    아웃렛 등으로 사용되는 옛 육림극장 모습. 

    묻고 싶다. 그 공간이 지녔던 정서와 사람들의 추억은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져도 되는 것일까. 도청 소재지라곤 하지만 예술영화 상영관이나 미디어 센터 같은 문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춘천에서, 육림극장 같은 문화재급 건물을 보존하며 특색 있는 문화 행사와 상시적인 상영 이벤트를 위해 활용했으면 어땠을까. 물론 이런 일에 공적 자금이 투여되는 덴 ‘현실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멸해버린 춘천의 옛 극장가를 보면서,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와중에 춘천문고 만천점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 주변의 문화 공간들은 그렇게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그렇게 과거가 지워진 공간은, 과연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점포 공실처럼 비워 놓는다면, 그곳은 언젠가는 폐허가 될지도 모른다. 

    ■김형석 필진 소개
    -춘천영화제 운영위원장
    -영화 저널리스트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저작권자 © MS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4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