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인터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세 남자에게 찾아온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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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인터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세 남자에게 찾아온 겨울

    춘천출신 이병욱 작가 '세 남자의 겨울'
    '나'와 아버지, 이외수 작가 일화 담아

    • 입력 2022.08.17 00:01
    • 수정 2022.08.18 07:07
    • 기자명 오현경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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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 부적응자들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까?”

     

    1972년 9월 16일,  故 이외수 작가가 이병욱 작가에게 '보고 싶다'며 보낸 엽서. (사진=이병욱 제공)
    1972년 9월 16일, 故 이외수 작가가 이병욱 작가에게 '보고 싶다'며 보낸 엽서. (사진=이병욱 제공)

    1970년대 춘천, 유독 추웠던 겨울을 지낸 세 남자의 이야기가 장편 소설로 탄생했다. 소설은 실화가 바탕이다.

    이병욱 작가는 소설 '세 남자의 겨울'에서 자신과 아버지, 그리고 대학 시절 문학 이야기를 나누던 선배 故 이외수 작가와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소설의 시작은 이 작가가 강원대 국어교육과 졸업을 앞둔 1973년의 어느 겨울이다.

    소설은 갈 곳 없는 처지에 후배의 짐 방에 얹혀살면서도 뻔뻔한 이외수 작가의 행동들을 재미나게 묘사했다. 이외수는 자신의 등장을 불편하게 여기는 방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랫목이 따뜻하지 않다’며 낡은 방 상태를 불평했다. 또 ‘라면 하나 끓여 먹었으면 한다’는 요구도 했다.

    작가는 대책 없이 막무가내인 이외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애정을 가진 순수한 사람으로 그렸다.

    모든 게 부족했던 시절,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한 채 추운 겨울을 이겨낸다. 문학 얘기를 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온기를 나눴다.

    그 겨울에는 이병욱 작가의 아버지인 이형근 선생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영화감독을 꿈꿨다.

    이형근 선생은 한국전쟁으로 부친이 납북된 후 얼결에 제지공장과 인쇄소 운영을 맡게 됐지만, 얼마 못 가 모두 내리막길을 걸었다. 예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돈을 벌기보다 예총 일을 한 게 원인이다. 특히 예총 사무국장을 맡아 김유정 문인비를 건립하는 데 총대를 멨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났어”라고 중얼거리는 큰아들의 말에 “부모를 잘못 만났다고? 나는 세상을 잘못 만났는데”라고 답한 이형근 선생의 말이 작가의 심정을 대변한다.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세 남자의 이야기는 시간 순서가 아니라 작가의 기억 흐름에 따라 흘러간다. 다양한 시간대를 자연스럽게 오고 가며 몰입감을 높인다.

     

    '세 남자의 겨울' 저자 이병욱. (사진=오현경 인턴기자)
    '세 남자의 겨울' 저자 이병욱. (사진=오현경 인턴기자)

    ▶[인터뷰] 이병욱 작가 일문일답

    Q.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고 하는데, 픽션은 어느 정도인가?

    A. 실화가 80%고 픽션이 20%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일어난 사건들은 대부분 있었던 일이고 자세한 시기나 인물명 등을 지어냈다. 반세기 전의 겨울을 회상하면서 적었기 때문에 완전하게 기억해내기 힘들었던 이유다. 정확히 말하면 나와 아버님, 외수 형 세 사람은 실제다. 그 외 인물들은 사생활 등의 문제로 가명을 썼다. 세 남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보조적인 인물들은 이름을 바꿔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Q. 이외수 작가와 보냈던 1973년 겨울에 대해 떠올린다면?

    A. 외수 형을 처음 만났던 것은 여름이었다. 그 양반의 싸구려 하숙방에서 같이 어울려 문학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그 후에 세월이 지나 외수 형이 교대를 자퇴하고 인제 분교로 내려가서 소사로 근무하다가 계모와 갈등 끝에 가출해 한겨울에 온 것이다. 당시 우리 집안 사정도 파산 지경이었기 때문에 오갈 데가 없어서 누나네 집 짐 방에 얹혀 지냈다. 말이 짐 방이지 조그만 방에 짐이 가득 쌓여서 사람이 누울 공간은 한 평에서 두 평밖에 안 됐다.

    Q. 이외수 작가의 존재가 부담되지는 않았나?

    A. 당시 나는 졸업을 앞두고 대표작이라도 남기려고 최선을 다하는 판에 외수 형이 나타나 소설 마무리를 못 짓고 있는 상태였다.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내보내나’하는 내적 갈등이 심했다.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겨웠다. 그러나 옛날의 춘천은 지금보다도 매우 추웠다. 해마다 겨울이 지나면 다리 밑에 거지들이 얼어 죽었다는 소문을 듣던 시절인데 그때 외수 형을 내쫓을 수가 없었다.

     

    소설 '세 남자의 겨울' 표지 이미지. (사진=이병욱 제공)
    소설 '세 남자의 겨울' 표지 이미지. (사진=이병욱 제공)

    Q. 결국, 이외수 작가를 집에서 내보내고 이별했는데?

    A. 어머니가 내 속마음을 눈치채고 아버지의 연탄직매소로 형을 보냈지만 결국 연탄직매소도 정리하고 춘천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에 13년 치 일기장을 모조리 불태웠다. 춘천에서 있었던 일을 정리하고자 했었고 어떤 면에서는 외수 형과의 관계도 끊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내가 삼척 중학교로 발령 난 뒤 외수 형과 떨어져 지내며 오랜 세월 동안 서먹한 관계였다. 그렇게 외수 형의 연락을 피하다가 겨울방학 때 춘천에 와서 중앙로 로터리 건널목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난 도망갈 수도 없고 그냥 서 있었는데 외수형이 건너오더니 날 껴안고 울더라. 내가 마지막에는 외수 형을 외면했지만 나 때문에 그 겨울을 살았다는 고마움도 있었을 테고, 유일하게 문학 얘기가 잘 통하는 후배로서 날 기억했던 것 같다.

    Q. 소설 속 아버지가 김유정 문인비 건립을 위해 전 재산을 털면서 가족들이 상당히 고생했다고 하는데?

    A. 당시 아버지가 사무국장으로 일했던 예총은 예산 지원이랄 것도 없었고 모든 게 부족했다. 김유정 문인비를 세우기로 했을 때 막상 돈을 거두기 시작하니 사람들이 잘 참여하지 않았다. 술 마시면서 얘기할 때 하고 정작 주머니 털어 돈 낼 때가 다르더라. 그래서 아버지가 일단 일은 벌여놨는데 돈이 모이지 않으니까 고민을 하셨던 것 같다. 그 일대 땅을 사는 비용이나 여러 행사 비용 등 자금이 막막해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재산인 거두리 야산을 헐값에 팔아치운 것이다. 어렵고 힘든 시절에 식구들은 그 산을 팔면은 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원래도 미움받는 대상이었던 아버지가 그 산을 팔고 나서는 더 큰 미움을 사게 됐다.

    Q. 당시 여러모로 가족들을 힘들게 한 아버지를 미워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방식이 아버지와 묘하게 닮아있는 것 같다.

    A. 외수 형도 나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내 심정은 한마디로 ‘망연자실’이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가 현실적이지 못해서 그렇지 멋있는 가장이 되고 싶어 했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했는데 당시 일자리가 없어서 워낙 사기꾼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계속 미끄러졌던 것으로 생각한다.

    Q.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시나.

    A. 지금 생각은 예전과는 다르다. 결과적으로 내가 아버지께 불효했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아버지를 잘못 만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성질이 만만치 않은 큰아들을 잘못 만났다. 그때는 서로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불효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방법이 있다고 하면 아버지가 생전에 한 일 중 가장 의미 있는 일인 김유정 문인비를 내가 세상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 소설이 쓰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한승미 기자·오현경 인턴기자 singme@m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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