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투데이 칼럼] 청와대를 나온 대통령과 ‘영부인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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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투데이 칼럼] 청와대를 나온 대통령과 ‘영부인 여사’
  • 한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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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7.0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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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혁 콘텐츠2국장
한상혁 콘텐츠2국장

우리나라 청소년이 학교생활을 어려워하는 이유에 대해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박사는 흥미로운 견해 하나를 제시했다. 영미권에서는 같은 반 아이들을 classmates, ‘반 생활을 같이하는 이들’로 부르는데, 국어에는 해당하는 단어가 없고 모두를 ‘반 친구’로 부른다. classmate와는 싸우지만 않으면 성공인데, 반 친구와 잘 지내지 못하면 괴롭다.

이처럼 현실과 언어, 특히 어휘는 종종 일치하지 않으며 이때 새로운 단어가 생기거나 없어지기도 한다. 최근 전남 완도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조유나양 가족 사건은 과거 같으면 언론에서 ‘동반자살’이 의심된다고 표현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최근에는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를 ‘동반’이란 단어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앞으로는 영어권에서처럼 ‘살해 후 자살(murder-suicide)’이란 표현이 정착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런가 하면 ‘영부인(令夫人)’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돼서 사람들의 인식을 혼동시키는 경우다. ‘영부인(令夫人)’은 사전상 의미로 ‘남의 아내를 높이는 말’이란 뜻 외에는 없다. '대통령 영부인'이라고 쓸 수 있지만 ‘영부인’이 '대통령 부인'이란 뜻으로 쓰일 수는 없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법률이나 제도에서도 대통령 부인의 지위와 책임, 역할 등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내 최대 포털 네이버에 '영부인'을 치면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 얼굴과 프로필이 뜬다. 정치인 중에서도 '영부인 패션' '영부인 외교' 등을 운운하며 '영부인'을 그런 의미로 쓰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심지어 상당수 언론에서도 '영부인'이란 말을 대통령 부인과 동일시한다. 영부인이란 직책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듯하다.

‘classmate’ 사례처럼 언어 표현은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준다. 김 여사의 '개고기 식용 금지' 발언 이후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김 여사가 대통령 부인이자 애완동물을 키우는 한 개인으로서 개고기 식용 금지 입장을 내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영부인'이 개고기 금지를 제안했다고 받아들이는 쪽에선 무게가 다르다.

‘여사(女史)’란 말은 어떨까. ‘여사’는 이름 뒤에 붙여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여성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김건희 여사’라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은 아니지만, 형평성이 있는 말인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언론에서 70~80대 고령 여성을 제외하고는 유독 대통령 부인에게만 '여사'라는 말을 붙인다. 라디오에서 ‘김건희 여사’ 대신 ‘김건희씨’라는 말을 썼다가 예의가 없다며 비판을 받은 사람도 있다.

‘영부인’이나 ‘여사’라는 말의 용례는 과거 신문에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란 말이 자주 등장하면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은 국부 혹은 국민의 지도자, 대통령 부인은 국모 혹은 왕비로 인식되던 시절이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을 국부로 여기는 인식은 사라졌지만, ‘영부인’이란 단어나 과해 보이는 ‘여사’라는 호칭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당선 당시 그가 미혼이었던 점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남성 대통령의 여성 배우자는 ‘여사’로 칭하면 되지만 여성 대통령의 남성 배우자를 칭할 말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여성 대통령이 또 당선되지 말란 법이 없으므로 이 역시 언제까지나 미뤄둘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최근 김 여사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 윤 대통령과 동행해 외교무대에 데뷔하면서 대통령 부인의 지위와 책임, 역할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될 조짐이 보인다. 당초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대통령 배우자 의전을 담당하는 청와대 제2부속실을 폐지하겠다고 했으나, 현재는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다수다. 법적으로 대통령 부인에게 지위와 역할이 없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외교무대에서는 각국 정상의 배우자 프로그램이 존재하고 그 의전을 담당할 조직은 필요하다.

말이 나온 김에 ‘대통령’이란 말도 다시 생각해 볼 만하다. 대통령제의 원조 격인 미국에서 'president'는 ‘회의를 주관하는 대표자’ 정도의 의미인데, 이 말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수입되면서 대통령(大統領)으로 오역됐다. 통(統)과 영(領) 모두 ‘거느린다’는 뜻이고 앞에 대(大)자가 붙었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정부 수장에게는 어울리는 말이었겠지만 현재 혹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민주공화국에 와서는 과도하게 들리는 말이다.

청와대를 나온 대통령은 승자독식-정치 보복의 악순환을 낳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집단의식의 발현일 수 있다. 이렇게 제도와 사람들의 인식과 언어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변화한다. 대통령 부인의 호칭뿐 아니라 정확한 역할과 책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함께 이뤄져야 할 때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작년 12월 “영부인이란 말을 안 썼으면 한다”고 했다. 이를 “‘영부인’이란 말은 잘못됐으니 쓰지 말아야 한다”고 정정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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