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은 모르는 요즘 것들의 '운동'
  • 스크롤 이동 상태바

    586은 모르는 요즘 것들의 '운동'

    • 입력 2022.06.16 00:01
    • 수정 2022.11.09 14:47
    • 기자명 권소담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87년, 전두환 군사 정권에 맞서 일어난 6‧10 민주 항쟁은 586세대(50대‧80년대 학번‧60년대생)의 승리로 역사에 기록됐다. 노태우 정부 끝자락에 태어난 1990년대생 필자에게 35년 전 6월은 오래된 ‘신화’였다.

    이 신화는 이웃 학교 학생회관에 나부끼는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걸개그림으로, 시위 현장에서 서로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사용했다는 풍물패의 ‘패명’으로 살아남아 30년 뒤 후배들의 대학 생활까지 뒤흔들었다.

    레트로 열풍을 타고 미디어에서는 586을 자유와 낭만의 상징으로 소비해왔지만, 이들은 1987년 체제 이후 등장한 한국 사회의 공고한 기득권층이다. 6월 항쟁을 기점으로 제도권 정치에 유입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파워 엘리트로 거듭났다.

    ‘청년 정치인’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이후 ‘586 용퇴론’을 꺼내 들며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박 전 위원장은 “586의 사명은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이 땅에 정착시키는 것이었다”며 “이제 그 역할은 거의 완수했고, 아름다운 퇴장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의 새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586 정치인’ 우상호 의원은 “오래 해먹고 나이가 있어서라면 우리보다 더 나이 많은 오래된 분부터 물러가라는 게 정합성이 있다”며 “당하는 우리도 힘들다”고 받아쳤다.

    ‘586 용퇴론’은 나이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었다.

    586 정치인들이 그동안 보여온, 현실의 삶과 괴리된 기계적인 진보주의 이데올로기와 진영논리에 국민들은 공감하지 못했다. 연이어 발생한 권력형 성범죄는 한때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불렸던 이들의 도덕성에도 흠결을 냈다. 586은 시대의 승리자로 기득권이 된 후에도 사회적 약자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반성의 부재가 용퇴론을 소환했다.

    586세대의 정치적 태생은 그들이 이끌었던 1980년대 학생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2020년대 학생운동에서부터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

    ‘통일이냐 노동이냐’ 같은 해묵은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 간 논쟁은 청년들에게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기후 변화와 부동산, 취업, 물가 상승 등 당장의 생존 위기를 마주한 이들에게 이데올로기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뿐이다. 청년들의 실천은 환경과 인권, 대학 등록금 같은 생활 밀착적인 주제로 옮겨갔다.

    코로나19로 저하된 대학 교육 서비스의 품질을 지적하며 등록금 반환 운동을 이끈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결성된 '평화나비 네트워크', 장애 대학생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전국 13개 대학 인권 동아리가 뭉친 '장애인대학생네트워크' 등의 단체가 자신의 영역에서 활동 중이다.

     

    1980년대와 2020년대 학생운동. (그래픽=MS투데이 DB)
    1980년대와 2020년대 학생운동. (그래픽=MS투데이 DB)

    지난 2020년 설립된 대학생기후행동 강원지부는 강원 도내 대학생 40여명으로 구성돼 지역 사회에서 기후 정의 운동을 펼쳐나가는 학생운동 단체다. 20~30년 전 배출된 온실가스로 인한 현재의 기후 위기가 가장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불평등의 구조를 인식하고, 미래의 환경을 바꾸기 위해 실천하는 청년들이 모였다.

    각자의 관심사와 개성이 중요한 MZ세대의 특성은 학생운동의 경향성에도 반영됐다. ‘요즘 것들의 운동’은 사회 문제에 대한 개인의 인식과 다양성에 기반한 실천에 초점을 둔다.

    이들은 MT에 가서도 고기를 굽지 않는다. 매일 비건(Vegan)을 실천하지는 못해도, 육식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며 함께 하루를 보내자는 의미다. 집회 현장에서 목이 터지게 부르는 투쟁가보다는 텀블러와 다회용기 사용, 철저한 분리수거 같은 제로웨이스트 실천이 이들에게 더 중요하다.

    김하종(29) 대학생기후행동 강원지역 대표는 “다수의 학생운동 단체들이 과거 학생회 조직에서 출범했기 때문에 1980년대식 질서와 문화가 남아있지만, 그 위계와 서열화 문제를 깨나가는 과정을 겪고 있다”며 “소위 ‘운동권’이라 불리는 계열은 대학 내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선한 영향력을 실천하려는 대학 새내기들이 모인 단체가 자리 잡아 가고 있다”고 말했다.

    ‘기후 정의 운동가’로 자신을 설명한 김하종 대표는 올해 4월 생일을 맞아 후원 모금을 진행했다. 생일 선물 대신 주변에서 뜻을 모아준 후원금을 지역 기후 운동가의 활동비로 사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웃에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고 연대하기 위함이었다.

    올해 초에는 ‘기후 정의 실현을 위한 재기발랄 지역 청년 네트워크 오늘 잇다’라는 비영리 스타트업을 창립해 학생 활동가들의 졸업 후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586세대가 사회 각계각층의 기득권으로 자리 잡아 가는 동안 이들이 남긴 1987년 6월의 유산은 이렇게 변모해왔다.

    청년들은 항변한다. 이제 기득권이 된 당신들이 가진 것을 다시 나누어달라고. 민주주의를 손으로 일궈낸 586세대가 가진 사회적 역량과 자원을 새롭게 도전하는 청년들의 기회의 장으로 활용해달라는 의미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학생 활동가는 “어린 것이 뭘 아느냐”고 타박하는 선배에게 “우리는 당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며 되받아쳤다고 했다.

    청년들은 자신이 믿는 가치를 삶 속에서 실천할 용기를 알고 있다. 그 실천을 ‘재기발랄’하게 이웃에게 전하며 자신의 생업으로 삼을 줄 아는 창의력과 추진력도 가졌다.

    기득권이 된 586에게 묻는다. “청년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권소담 기자 ksodamk@mstoday.co.kr]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저작권자 © MS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