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마음풍경] 얼음과 냉장고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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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의 마음풍경] 얼음과 냉장고에 대한 추억

    • 입력 2022.05.15 00:00
    • 수정 2022.05.16 13:23
    • 기자명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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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다른 사람들은 하루에 커피를 몇 잔 정도 마실까. 아침, 점심, 저녁 식후에만 마셔도 하루 석 잔의 커피를 마시게 된다. 그런데 식후만이 아니라 다른 사무실에 방문하면 으레 커피를 내온다. 그러다 보면 석 잔이 아니라 하루 다섯 잔 커피를 마실 때도 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따뜻한 커피만 마신다.

    그런데 하루 서너 잔의 커피를 마실 때마다 얼음을 넣어 차게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신다’고 ‘얼죽아’라고 부른다. 눈 오는 한겨울에 투명한 페트 잔에 얼음을 동동 띄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새빨갛게 언 손으로 받아들고 가는 사람을 본 적 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얼죽아’라고 눈 오는 날 풍경으로 인터넷에 공개되기도 한다.

    요즘 가정에는 물론 웬만한 사무실에도 얼음 나오는 냉장고가 다 구비돼 있다. 날이 더워지며 사무실에서 얼음 띄운 음료를 마시는 동안 누군가 예전에 냉장고가 없던 시절 특별한 냉장 방법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한 사람이 자기 아버지가 수박을 사 오던 날의 이야기를 했다. 정말 어쩌다 한번 사 오는 수박을 자기 집만 먹을 수가 없어 몇 쪽 갈라 이웃에 돌리고, 그렇게 해서 남은 걸로 할아버지, 할머니에서부터 온 식구가 다 먹자니 물을 부어 양을 늘리고 거기에 사카린을 타서 화채를 해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자기가 매일 얼음집으로 심부름을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만 해도 시내에 살고 읍내에 살던 사람들의 얘기였다. 나처럼 산골에 살던 사람들에겐 우물물이 냉장고 역할을 대신했다. 어쩌다 수박 한 덩어리가 생길 때에도 큰 함지에 가득 우물물을 채운 다음 거기에 수박을 담가 두었다. 두꺼운 수박 표면을 생각한다면 실제 냉장 효과는 별로였겠지만 마음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시원한 수박을 먹었던 셈이다. 여름에 담가 먹는 물김치와 오이소박이도 작은 김치단지에 담아 우물물 함지에 담가 두었다. 물도 햇볕에 따뜻해지면 안 되니까 수시로 갈아줘야 한다.

    그런 가운데 얼음에 대한 신나는 추억 하나가 있다. 강릉 시내 중학교에 들어가 지금처럼 여름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누군가 시내에 있는 제빙공장 얘기를 했다. 공장에서 얼음을 얼려 꺼내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을 잘 맞춰 가면 얼음 한 덩어리를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가 끝난 다음 친구들과 우르르 제빙공장으로 달려갔다. 가서도 한 시간쯤 기다려 새하얀 얼음이 나오는 걸 지켜보았다. 그중에 주먹만 한 얼음 한 덩어리를 매우 진귀한 보석처럼 얻었다. 마음은 그것을 그대로 집에 가져가 할아버지한테도, 또 동생들한테도 자랑하고 싶은데 집이 멀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때 제빙공장 아저씨가 자기도 말로만 들었다는 냉장고에 대한 얘기를 했다. 얼음을 보관하는데 아이스케이크 통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데, 강릉 시내를 통틀어도 그런 물건이 있는 집이 열 집도 안 된다고 했다. 물을 넣어 얼음도 얼리고, 또 얼음을 넣어두면 그 얼음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다고 했다. 내가 처음으로 이해한 냉장고는 음식을 보관하는 부엌의 가전제품이 아니라 제빙공장의 제빙기처럼 얼음을 얼리는 기계이자 또 얼음을 녹지 않게 보관하는 기계와 같은 것이었다. 강릉비행장 미군부대에 다니는 어떤 사람 집에 미국에서 건너온 그런 기계가 있는데, 그 집 아이들은 한여름에도 얼음집에 가지 않고 집에서 그냥 얼음을 얼려서 먹는다고 했다.

    나로서는 정말 그림의 떡 같은 이야기였다. 그때 나를 절망케 했던 것은 그런 기계는 또 얼마나 비쌀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대관령 아래 우리 집에 그런 기계가 있다 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는 그걸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만은 이다음 꼭 그런 기계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내 소유의 물건으로 처음 냉장고를 갖게 된 것은 그러고도 15년이 지나 결혼을 하면서였다. 비록 단칸방이었지만 냉장고가 우리 신혼방에 들어왔을 때 내가 제일 처음 해본 것은 냉장실에 이런저런 음식을 넣는 것이 아니라 아래위 칸으로 나누어져 있는 위쪽 냉동고에 물 한 그릇 떠 넣어서 얼려 보는 것이었다.

    한발 한발 다가오는 이 여름을 모두 냉장고 안처럼 시원하게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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