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마음풍경] 추억 속의 어린 세배객들
  • 스크롤 이동 상태바

    [이순원의 마음풍경] 추억 속의 어린 세배객들

    • 입력 2022.01.23 00:00
    • 수정 2022.01.24 11:03
    • 기자명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설날이 다가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가 시내 상회에서 달력을 얻어 오면 우리가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은 올해는 설날이 언제 들었나 하는 것입니다. 대개는 1월 말이나 올해처럼 2월 초에 듭니다. 멀게 들면 왠지 달력이 야속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태어난 마을은 대관령 동쪽 아래 깊은 산속 마을입니다. 450년 된 조선 중기의 향약을 지금까지 실천하고 지켜오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유가 전통마을입니다. 다들 학교 다닐 때 향약의 4대 강목에 대해 공부도 하고, 다음 중 향약의 4대 강목이 아닌 것은? 하고 시험도 보았을 겁니다.

    우리나라 향약의 4대 강목은 율곡 선생이 청주 목사로 재임하면서 발전시킨 ‘서원향약’과 벼슬에서 물러난 다음 가솔을 이끌고 황해도 해주에 머물 때 제정한 ‘해주향약’을 토대로 합니다. 제일 강목은 덕업상권(德業相勸)입니다. 효행과 우애와 같은 좋은 일은 서로 권하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과실상규(過失相規)는 부모에 불효하고 동기간에 우애를 저버리고 마을 사람들 간에 분란을 조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규제하여 그러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예속상교(禮俗相交)는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바른 예의를 가지고 대하고, 네 번째 환난상휼(患難相恤)은 집안에 초상이 나거나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서로 돕자는 것입니다.

    중종 때 조광조가 중국의 여씨향약을 우리나라에 받아들이려 애쓴 것이나 이후 율곡 선생이 청주와 해주에서 향약을 제정한 것은 일반 백성들이 향약으로 단합하여 마을 토호들의 횡포로부터 벗어나고 견제하자는 뜻입니다. 우선 경제적 횡포로부터 벗어나는 일인데, 마을에 향약을 만들면 향약의 규칙에 따라 마을 전체가 계원으로 참여하는 대동계가 만들어집니다.

    대동계원이 회비를 내어 마을 공동재산으로 혼인할 때 타고 다니는 가마도 장만하고, 잔칫날에 신랑과 신부가 입는 의복 일습도 장만하고, 상여도 장만하고, 또 그런 일이 있을 때 쓰는 수백 죽의 동네 그릇도 장만하고, 해를 가리고 비를 막아주는 천막도 마련합니다. 그래서 향약을 바탕으로 한 마을 대동계를 ‘차일계’라고도 부릅니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모두 비싼 대가를 치르고 마을 부잣집 것을 빌려 썼는데 이걸 마을 공동으로 마련하여 서로 작은 비용으로 이용합니다. 조광조가 중국의 여씨향약을 도입하려 했을 때 기득권 귀족들이 사생결단 반대했던 것도 그들의 권력과 이익이 바로 침해받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다시 제 고향마을로 돌아가 설날이 되면 설날엔 집안 단위로 큰집에서부터 작은집 순서로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고, 설날 다음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촌장님 댁에 모여 촌장님께도 세배하고 마을 사람들끼리도 세배를 나눕니다. 조선 중기에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마을 촌장님이 계시고, 또 이렇게 촌장제를 실시하고 있는 것도 향약이 아직까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향약의 제일 어른이 바로 촌장님이기 때문입니다.

    설날이 되면 어른들만 세배를 다니는 게 아닙니다. 어린 조무래기들도 집안 단위로 적으면 다섯 명, 많으면 열 명 넘게 무리를 지어 세배를 다닙니다. 세배 가는 집의 순서도 다 정해져 있고, 어느 집에 갔을 때 누구부터 세배를 드리는지 이 순서도 다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 집 사랑방을 지키고 있는 가장 큰 어른부터 세배를 드릴 것 같지만 그러면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야단을 듣습니다.

    대소가에 세배 다닐 때 제일 먼저 세배하는 곳은 사당이 있는 집이면 사당, 사당이 없는 집은 그 집 뒷사랑 벽장 옆에 신주를 모셔 보관하는 사우(祠宇)입니다. 여기에 다섯 명, 열 명의 조무래기들이 죽 늘어서서 두 번 절을 한 다음 사랑으로 와서 그 집 어른께 절을 하고, 안방으로 가서 중간 어른들과 아주머니들께 절을 합니다. 이걸 단체로 절도 있게 잘하면 인솔하는 형에게 이제 장가를 보내도 되겠다고 칭찬을 합니다.

    어른 세배객들에게는 술상을 차려 대접하지만 어린 세배객들이라고 소홀하지 않습니다. 술 대신 식혜를 내오고 다과상도 어른들의 상보다 푸짐합니다. 나올 때 집에서 배운 대로 다과상을 절반 남기면 어른들이 상의 것을 아이들의 주머니에 넣어줍니다. 이런 걸 배우며 어른이 됐는데 이제는 어른도 아이도 세배를 다니지 않습니다. 촌장님께 단체로 드리는 마을 합동 세배도 코로나 때문에 이태나 멈췄습니다. 얼른 풀리길 바랍니다.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저작권자 © MS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