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마음풍경] 자비롭고 거룩한 팥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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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의 마음풍경] 자비롭고 거룩한 팥죽

    • 입력 2021.12.26 00:00
    • 수정 2021.12.26 01:02
    • 기자명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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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동짓날은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입니다. 어린 시절 동짓날이면 아이들도 새벽같이 일어납니다. 부엌 가마솥에서 팥죽이 끓고 있기 때문이지요. 팥죽을 쑤는 준비는 이미 전날부터 시작됩니다. 들에서 나는 곡식 중에 가장 붉고, 가장 단단한 것이 팥입니다. 잣과 호두를 송곳니로 쉽게 으깨는 사람들도 바짝 마른 팥을 이로 으깨는 것은 대단히 조심스러워합니다. 팥죽은 우선 팥이 흐물흐물하게 삶아져 껍질과 껍질 속의 알맹이가 하나처럼 섞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자면 오래 불리고 또 오래 삶아야 합니다. 이 과정이 이미 전날부터 이루어지는 거지요.

    동지가 돌아온다고 해마다 팥죽을 쑤어 먹었던 것은 아닙니다. 동지는 일 년 24절기 중 해가 가장 짧은 날로 달력에도 아주 고정되어 있습니다. 왔다 갔다 하는 건 동짓날이 그해 음력 동짓달의 며칟날이냐 하는 거지요. 올해는 동짓달 열아흐레군요. 이러면 어른동지라고 부릅니다. 이게 그해 동짓달이 늦게 시작하여 아흐렛날 안쪽에 들면 애동지라고 부르는데, 특히나 닷새 안쪽에 들면 애동지 중에서도 어린 동지라고 하여 팥죽을 쑤어 먹지 않고 시늉처럼 팥떡을 조금 해 먹었습니다.

    팥떡이든 시루떡이든 팥이 들어간 떡은 동지가 아니더라도 수수팥떡을 해먹을 때도 있고 해서 기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팥죽은 동지가 아니면 먹기가 귀한 음식이지요. 아니, 동지가 아닌 때에도 먹은 기억이 있군요. 병환 중에 있던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나쁜 액운이 끼지 말라고 아주 급하게 팥죽을 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얘기했듯 제대로 된 팥죽은 오래 불리고 오래 삶아야 하는데, 초상 액막이 팥죽을 미리 준비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급하게 팥을 맷돌에 갈아 그야말로 희멀건 팥죽을 끓여 식구들도 숭늉처럼 먹고 집 주변에 나쁜 귀신들이 접근할 수 없게 뿌리기도 합니다. 이 팥죽은 동지 팥죽 같은 맛이 나지 않습니다.

    아이들로서는 일 년에 한 번 먹는 팥죽이다 보니 그해 동지가 애동지인지 어른동지인지 음력 날짜가 작은 글씨로 인쇄된 달력에서 그것부터 확인합니다. 그런데 그게 애동지면 실망이 여간 크지 않지요. 그러면 여러 날 전부터 어른들에게 애동지여도 팥죽을 해 먹자고 떼를 씁니다. 애동지에는 팥죽을 쑤지 않는 게 예전부터 내려오는 풍습이니 이걸 어머니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이 떼를 어머니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나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떼를 쓰는 거지요.

    제가 어른이 되어 고향을 떠날 때까지도 시골집에서 동짓날 차례를 지냈습니다. 차례를 지내는 날을 꼽아보면 설날, 대보름, 한식, 단오, 추석, 동지, 그리고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날에도 차례를 지냈는데, 그믐날에는 아침이 아니라 저녁 차례를 지냈고, 이때 제상에 올리는 음식은 만둣국이었습니다.

    돌아보면 동짓날 차례는 참 재미있는 풍습이 있습니다. 제상 위에 당연히 팥죽이 올라가지요. 다른 차례는 엄청 격식을 갖추어 천천히 느리게 지내 차례 중간에 조상님들이 음식을 드시게 문을 닫고 나오는 합문 시간도 길게 잡는데 동짓날 차례는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엄청 빨리 속도를 내서 지냅니다. 왜 그렇게 빨리 지내냐고 물으면 동짓날은 일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날이어서 차례를 지내다가 하루해가 다 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건 올해 동짓날에 들은 팥죽 이야기입니다. 춘천의 어느 목사님이 동짓날 누가 팥죽을 가져오나 기다렸는데 아무 연락이 없던 중에 봉의산 아래의 친구가 전화를 해서 “봉의사에서 팥죽 두 사발 내려왔으니 가져가시게” 하는 기별이 왔답니다. 그 팥죽을 받아 교회로 가져오던 중 수년째 누워 계시는 96살의 원로 장로님 댁에 빈손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봉의사 스님 팥죽’을 들고 갔답니다. 더구나 환중에 계시는 이분에게 목사님은 하나님과 진배없는데, 두 분 대화가 재미있습니다. “허, 목사님이 오셨는데, 누워 있어서 어쩌나.” “제가 절에서 쑨 팥죽을 가져왔는데 한술 잡숴보세요” 그릇에 나눠드렸더니 몇 숟가락 드시고 “하, 스님이 쑤고 목사님이 가져온 식은 팥죽이 꿀맛이네” 하였답니다. 정말 복된 일이지요. 이렇게 동지 팥죽을 절과 교회, 스님과 목사, 연로하신 교우가 나눠 드셨다는 얘기를 듣고 저는 이 아름다운 팥죽을 ‘자비롭고 거룩한 팥죽’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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