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마음풍경] 등잔의 심지를 깎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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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의 마음풍경] 등잔의 심지를 깎는 밤

    • 입력 2021.09.19 00:01
    • 수정 2021.09.20 01:49
    • 기자명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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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던 때는 올가을도 길게 장마가 지나 했더니 추석을 앞두고부터는 계속 맑은 날이 이어진다.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는 사람이라 매일 아침 김유정역에서 내려 김유정문학촌으로 오노라면 하늘빛이 그렇게 푸를 수가 없다. 해마다 가을 풍경이 비슷한 듯해도 옛 어른들 구분으로는 들판의 오곡백과를 잘 익히는 가을 날씨가 있고, 또 어느 해는 들판의 곡식은 그저 그런데 산의 단풍 빛깔을 좋게 내는 가을 날씨가 따로 있다고 했다. 그런 구분이야말로 평생 자연 속에서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침에 무심코 하늘 한 번 쳐다본 날은 이상하게 그날 하루만도 여러 번 하늘을 보게 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구름 몇 점 떠 있는 하늘도 그 구름 몇 점 때문에 하늘이 더 높이 보일 때가 있다. 어린 시절 내게 ‘천고마비’라는 말을 가르쳐준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가을을 그냥 가을이라고 하지 않고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라고 돌려서 표현하는 것이 어린 나이에도 짧은 글짓기처럼 재미있게 느껴졌다. 진짜 말은 워낙 귀한 짐승이라 오히려 시골에서는 볼 수가 없고 우리집 외양간의 소를 보아도 그렇다. 소 등판에 자르르 윤기가 돌았다.

    ‘천고마비’와 함께 비슷한 때에 배운 말이 ‘등화가친’이었다. 이 말도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집에서 아버지한테 배웠다. 가을은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밤에 등불을 가까이하기 좋은 계절’이기도 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 시절 대관령 아래 산골짜기에 있는 우리 마을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방마다 등잔불을 써서 그 말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는지 모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서 밤에 등잔불을 가까이하는 것은 공부하거나 책을 볼 때 말고는 없었다.

    해가 져서 어둑해지면 등잔불 아래에서 저녁을 먹고, 저마다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는다. 텔레비전은커녕 라디오조차 귀했던 시절, 해가 진 다음에 우리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읽는 것 말고는 없었다. 아버지도 여러 자식을 키우다 보니 자식마다 제만큼 필요하다는 책을 다 사주지 못했다. 위로 형들은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나와 동생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해 가을, 시내 고등학교에 근무하던 아버지는 여러 자식이 함께 보라고 두꺼운 책 다섯 권으로 묶여 있는 삼국지 한 질과 또 머리가 굵어진 두 형을 위해 열두 권짜리 ‘한국문학전집’을 사왔다. 삼국지는 아버지도 다시 읽고, 형들도 읽고, 마땅히 읽을 만한 동화책이 없는 나 역시 그것을 읽었다. 이상하게 삼국지는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아마 서너 번 읽었을 것이다. 형제들끼리 삼국지 퀴즈 내기를 하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자연스럽게 나도 형들처럼 ‘한국문학전집’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무렵 가을밤의 독서를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읽었던 책들의 내용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내가 더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때 어린 시절 독서의 추억들이다. 나 혼자만 읽는 것이 아니라 안방에서는 바느질하는 어머니 옆에서 아버지가 책을 읽고, 건넌방에서는 두 형이 책을 읽고, 우리 방에서는 나와 동생이 방바닥에 엎드려 가슴에 베개를 받치고 그 앞에 책을 놓고 읽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정경이 여간 정답지 않다.

    중국 명나라 때의 괴이 소설 ‘전등신화’의 전등(剪燈)이라는 말이 등잔 심지를 깎아가며 읽을 만큼 재미있는 책이라는 뜻도 아버지가 알려주었다. 실제로 등잔은 불을 붙이고 한 시간쯤 지나면 심지 끝에 재가 쌓여 저절로 불빛이 어두워진다. 수시로 등잔 꼭지의 심지를 깎듯 이쑤시개나 성냥개비 같은 것으로 재를 긁어내야 다시 환해진다. 그런 등잔을 머리맡 가까이에 놓고, 가슴에 베개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다 보면 책갈피를 한 장 두 장 넘기는 아주 작은 바람결에도 등잔불이 흔들리고, 때로는 조금 세게 내쉬는 입김에 불이 꺼질 때도 있었다. 지금도 가을이면 그 시절에 읽던 책 생각이 난다. 며칠 전엔 그 시절에 읽고 가슴이 먹먹하도록 감동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예전 기분으로 돌아가 읽었다. 그러다 보니 ‘데미안’만 이제까지 예닐곱 번 읽은 것 같다. 다른 여가선용 거리도 많지만, 가을밤이야말로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산듯한 기운 속에 어린 시절 우리 머리맡에 놓였던 등잔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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