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번역, 외롭고 고단한 고난의 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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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의 딴생각] 번역, 외롭고 고단한 고난의 행군

    • 입력 2021.07.18 00:00
    • 수정 2021.07.19 00:17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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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내게 소설가 외에 번역가라는 타이틀이 하나 더 붙은 건 2007년 이후니까 15년쯤 되었다. 등단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두 종의 영어참고서와 프랑스 인문학자가 쓴 점성술 책을 번역한 적은 있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잠깐 동안의 ‘알바’에 지나지 않아 타이틀이 붙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정식으로 내게 번역가라는 타이틀을 붙여준 책은 〈정글북〉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시인이며 소설가인 러디어드 키플링의 장편소설 〈킴〉이었다. 〈킴〉은 ‘킴’이라는 아일랜드계 인도 소년과 부처의 행로를 좇아 인도 전역을 순례하던 티베트 노스님이 우연히 만나 함께 구도의 여정에 오르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키플링에게 영미문학 최초이자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영예를 안긴 작품이다.

    〈킴〉을 번역하게 된 게 지인의 소개에 의한 터라 당시만 해도 계속 번역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더구나 인도와 불교, 제국주의, 특정지역의 방언까지 뒤섞여 있어서 관련 텍스트들을 찾아보고 꽤 오랜 시간 정성을 들이긴 했지만 번역의 완성도를 자신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20세기 초반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키플링의 소설들이 우리말로 번역된 게 많지 않았던 탓인지 〈킴〉을 출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키플링의 작품집에 대한 번역의뢰가 들어왔고, 그렇게 발을 들인 뒤 해마다 한 권 이상의 번역서를 출간할 만큼 “번역이 본업인가?” 싶을 정도로 푹 빠져들었다. 소설은 제쳐두고 한 해 내내 번역만 해서 서너 권씩 책이 나올 때는 본말이 전도된 듯 자괴감마저 들곤 했었다.

    번역에 대한 전면적 회의가 든 건 본격적으로 번역을 시작하고 5년쯤 지난, 번역 의뢰도 꽤나 잦아지고 번역료도 제법 올라가 있던 2013년,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집에 대한 번역을 덜컥(!) 계약한 뒤였다. 영미문학사에서 난해하기로 손꼽히는 포크너는 번역가로서 도전해볼 만한 작가라는 생각뿐 아니라 소설가로서 원문을 독서할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했었는데, 첫 장을 펼치면서 일기 시작한 지끈지끈한 두통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기는커녕 통증의 강도가 오히려 가중되었다. 포크너만큼이나 난해한 문장의 소유자인 헨리 제임스의 단편집을 번역할 때와는 또 다른 압박이었다. 보통의 작품집보다 두세 배의 시간을 투여했음에도 완성도에 대한 자신감은 좀체 생기지 않았고, 마지막 교정을 볼 때까지 혹사라고 해야 할 정도로 참고자료와 비평문들을 살펴야만 했다. 그렇게 한다고 번역료를 더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번역에 대한 전면적 회의’가 밀려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포크너 작품집의 ‘역자후기’에 “포크너를 넘어설 수만 있다면, 아니 기꺼이 넘으려는 결심만이라도 견지한다면, 우리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넓고 깊은 문학의 바다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라고 쓴 건 독자에게 건네는 역자의 말인 동시에, 어쩌면 오히려, 번역을 한 나 자신에게 용기를 건네는 어줍은 위안이었을지 모른다.

    사실 일반 독자들에게 번역은 외국어로 된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이상일 리 없다. 번역 일을 하기 전의 나 역시 그런 독자와 다르지 않았다. 번역가의 뒤통수에 “혹시라도 잘못 옮겼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트라우마처럼 끈끈히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은 번역가가 되어서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번역서를 낸 분 가운데 한 사람인 소설가 안정효 선생은 잘못 번역한 사례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해 《오역사전》을 펴낸 적이 있는데 “번역은 요령이 아니라 끈기”라는 말이나 “번역은 문화다. 번역을 위해서는 해당 언어와 그 언어를 낳은 문화, 두 언어의 구조적인 차이까지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영상이라는 요소가 추가되면 시각적인 정보도 매우 중요해진다. 등장인물의 손짓이나 시선은 대본에 적힌 글만으로는 알 수 없는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이즈음 어느 유력 대선주자의 배우자가 쓴 학위논문에 대한 표절 시비가 한창인데, 그 논문의 영문초록에 나오는 ‘유지(維持)’라는 단어가 영어로 ‘Maintenance’가 아니라 우리말 발음 그대로 ‘Yuji’로 옮겨져 있어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누가 봐도 인터넷 포탈이 제공하는 번역기를 돌렸다는 걸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걸 교정도 보지 않은 채 제출한 것도 한심한 일이지만, 논문을 심사한 교수들이 심사란 건 하기는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 논문만 그렇겠냐는 것인데, 어쨌든 이 일을 계기로 논문작성과 심사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으면 싶다. 더불어 ‘인공지능’이란 그럴 듯한 수식어가 붙은 번역기가 만능처럼 여겨지는 인식도 재고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실시간으로 외국어를 옮길 수 있는 완벽한(!) 인공지능 번역기가 나온다면, 설사 그로 인해 번역가가 사라진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잘못 옮겨질 경우 매우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결코 간과되어선 안 된다. 번역가들이 늘 오역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에 시달리며 외롭고 고단하게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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