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책의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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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의 딴생각] 책의 값

    • 입력 2021.07.04 00:00
    • 수정 2021.07.04 06:49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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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책값’과 ‘책의 값’은 다르다. ‘책값’은 상품으로서의 책에 부여된 가치로, 이즈음은 대체로 1만 원을 조금 넘거나 2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 이 값은 책이 세상에 나올 때 명확히 정해져 있어서 서점 주인이 함부로 깎거나 더할 수 없는 절대적 수치다. 다만 출간된 지 오래되어 더이상 찍어내지 않게 되었거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독자가 낡고 험하더라도 구입하려는 경우에만 자의적으로 값에 변형이 일어나는데, 이때는 원래의 값에서 한참 내려가는 게 보통이지만 희귀성이 작용하면 오히려 그 값이 천정부지로 뛸 수도 있다. 그러나 설사 원래의 값에 수만 배가 뛰어오른다 해도 그건 여전히 ‘책값’일 뿐, ‘책의 값’은 아니다.

    ‘책의 값’은 책에 담긴 내용과만 관련이 있는 매우 주관적인 가치로, ‘책값’의 일률성이 우스워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누가 책을 썼는지, 책에 사용된 종이의 질이 어떤지, 두께는 얼마나 되며 단색으로 된 책인지 칼라인지, 사진이나 그림 같은 이미지가 어느 정도 들어가 있는지 등 ‘책값’의 결정에 지대하게 작용하는 요소들은 ‘책의 값’을 결정하는 일과 곧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전혀 무관할 때도 허다하다. 가령, 아무리 유명한 저자가 쓴 매우 고급한 지질에 엄청난 볼륨을 가진, 칼라로 된 사진과 그림이 화려하게 버무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의 값’은 영(0)이 될 수도 있으며, 반대로 무명의 저자가 쓴 매우 얇은 볼륨의 재생지로 된 단색의 책이라도 헤아릴 수 없는 ‘책의 값’이 매겨질 수 있다. 누구는 하늘처럼 떠받드는 책을 누구는 하찮기 이를 데 없는 책으로 여길 수 있는 것 - 이 자의적 판단의 근거가 종착하는 곳이 바로 ‘책의 값’이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책의 값어치란 게 ‘책값’이 아니라 ‘책의 값’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책의 뒤쪽 표지 하단에 적혀 있는 15,000원이라는 숫자가 우리가 읽으려는 책의 값어치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 책으로부터 15원도 되지 않는 값어치를 느낄 수도 있고, 1억5천만 원의 가치를 얻을 수도 있다. 삶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이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책 한 권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얻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그리 희귀한 사례가 아니다. 이 경우에 그 사람의 손에 쥐어졌던 ‘책의 값’은 숫자로는 도저히 표기할 수 없는, 새롭게 가지게 된 ‘생명’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다. 

    소유격 조사 ‘의’를 붙였을 때 일어나는 의미의 전도(轉倒) 혹은 각성은 책에만 해당되는 현상은 아니다. 가령, 매월 우리가 지불하는 ‘물값’은 기껏해야 몇천 원에 불과한 상수도 사용료지만, 헐값으로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그 ‘물의 값’은 화폐단위로 표시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단 하루만 마시지 못해도 확인되는 ‘물의 값’의 어마어마함을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리 자주 환기하며 살지 않는다. 우리의 이런 매우 인색한 태도는 ‘책의 값’에 그대로 적용된다. ‘책의 값’에 대한 우리의 이 태도를 조금 과장스럽게 표현하자면, 책은 그저 정가 15,000원짜리 상품에 불과하며 그 값이면 둘이서 맛집 짬뽕을 맛나게 먹거나 셋이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기겠다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이때 작가란 그런 별 것 없는 ‘상품’이 만들어지는 데 일조한 재료 공급자나 아이디어 제공자 이상이 아니다.

    “길은 다 갈 수 없고(行不盡路), 책은 모두 읽을 수 없다(讀不盡書)”는 옛 속담이 있다.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 공부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공부란 정말 그렇다. 다 갈 수 없는 무궁의 길을 가려하고, 모두 읽을 수 없는 무한의 책을 읽으려 하는 아름다운 모험이 공부다. 그리고 여기에 궁극의 삶, 우주적 오지랖으로만이 판단될 수 있는 ‘삶의 값’이 있다. 다 갈 수 없는 길을 뭐 하러 가며 다 읽을 수도 없는 책을 뭐 하러 읽느냐는 식의 삶을 살 뿐이라면, 그 삶이 가질 수 있는 ‘값’은 뻔하다. 그런 삶을 책에 비유하자면 뒤표지 하단에 적힌 15,000원 - 그 값 이상을 얻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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