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마음풍경] 선비는 밥값을 어떻게 계산했을까
  • 스크롤 이동 상태바

    [이순원의 마음풍경] 선비는 밥값을 어떻게 계산했을까

    • 입력 2021.06.27 00:00
    • 수정 2021.06.28 17:30
    • 기자명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629년 전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다.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은 한 나라가 망하고 새 나라가 들어선다는 뜻이다. 나라의 명운이 바뀌는 가운데서도 변함없는 것은 그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다. 그때 서울에는 얼마큼 많은 사람들이 살고 강원도에는 또 얼마큼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까. 어디에서 살든 사람들은 밥을 지어먹고 살았다. 여러 곡식 중에 쌀이 가장 귀한 양식이었다. 만물의 가치가 쌀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저자거리의 모든 물건이 쌀과 비교하여 가격이 매겨졌다. 설령 돈이 있어도 돈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시절이 더 많았다.

    그러던 시절 강원도의 선비가 서울로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무엇으로 노잣돈을 대신했을까. 중간중간 주막이든 민가에서 밥도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 하고 짚신도 갈아신어야 하는데, 이때 밥값과 하룻밤 묵어가며 바꾸어 신는 신값은 무얼로 계산했을까. 돈이라는 게 있기도 했지만, 하루 식사 한 끼에 엽전 얼마 하고 딱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처럼 큰돈을 내주면 잔돈을 거슬러주는 거래 방식도 없던 시절, 그런 계산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때그때 먹은 밥값이나 술값을 쌀로 계산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지만, 그러자면 시골 선비들이 서울로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저마다 등에 쌀 한 가마니씩 지고 다녀야 하는데, 또 과거시험을 보고 나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자면 그때에도 노자로 그만큼의 쌀이 필요한데 사극을 보든 뭘 보든 지게에 쌀가마니를 지고 다니는 선비는 본 적이 없다.

    그러면 그 시절엔 무얼로 그때그때 먹고 신세진 밥값을 계산했을까.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또 경상도에서 서울까지 오가는 길가의 주막과 민가가 처음 보는 손님에게 밥을 그냥 지어줄 리도 없고, 외상을 해줄 리도 없다. 사극을 보거나 옛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더라도 주인공 선비가 주막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잠을 잔 다음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잤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나는 모습은 보여줘도 밥값을 치르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일상생활에 돈이라는 게 그다지 유용하게, 또 빈번하게 쓰이지도 않던 시절,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아도 서로 물물교환하거나 물물교환이 어려울 경우 물건 값을 쌀값으로 어림하여 계산하던 시절, 서울로 과거시험 보러 가던 선비의 밥값은 무엇으로 계산했을까. 학교 다닐 때 옛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나, 그때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것은 줄줄이 암기하며 공부하면서도 정작 먹고 사는 일들에 대해서는 왜 배우지도 않고, 가르쳐주지도 않았을까.

    이때껏 여기에 대해 배웠다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서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일까. 어느 시대나 먹고 사는 일만큼 지엄한 것이 없는데 왜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때 가르치는 입장에 있던 사람들조차도 몰라서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지금 역사 선생님들은, 사학과 교수님들은 이런 것을 잘 아실까.

    이런 것이 궁금했던 시절이 있었다. 내게 그걸 가르쳐준 사람은 공부를 한 사람도, 학자도 학교 선생님도 아니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집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었다. 집안마다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얘기로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몇 대조 할아버지가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괴나리봇짐에 무얼 싸고 어떻게 쌌는지, 괴나리봇짐의 내용은 무엇인지. 그 안에 지필묵과 두루마리 면포를 싸서 그때그때 밥값으로 면포를 잘라주어 그게 절반쯤 떨어질 때쯤이면 서울에 도착하고, 과거시험을 본 다음 고향집에 올 때는 사람 얼굴도 홀쭉해지고, 등에 지고 있는 괴나리봇짐도 홀쭉해져 지필묵만 남아있었다는 얘기로 그것을 알려주었다. 쌀만큼이나 교환성이 높은 것이 면포라고 했다. 먹고 자는 일만큼이나 입고 입히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고 보니 외거노비의 일 년 몸값도 나라에 낼 세금도 면포로 계산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공부를 학교가 아니라 학교 문전에도 가 보지 못한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산 역사 공부하듯 배웠던 것이다. 학교공부가 아무리 높아도 가학(집안에서 하는 공부)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바로 엊그제가 조선시대의 마지막해이자 대한제국 원년인 1897년에 태어난 할아버지의 제삿날이었다.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저작권자 © MS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