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초대석] ‘춘천 의병아리랑 발굴’ 이유라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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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초대석] ‘춘천 의병아리랑 발굴’ 이유라 명창

    매년 6월 1일 의병의 날
    춘천 의병아리랑 등 ‘강원소리’ 발굴에 큰 기여
    故 안비취 선생에 사사, 30년 전부터 춘천 활동

    • 입력 2021.06.01 00:01
    • 수정 2021.06.02 06:51
    • 기자명 신초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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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세의 침략을 수도 없이 받았던 우리나라는 호국(護國) 영웅들을 추모하고 공훈을 기리기 위해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지정했다. 그 중에서도 매년 6월 1일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의병 곽재우 장군이 처음으로 의병 봉기한 날을 양력으로 바꿔, 국민에게 애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10년 5월 제정한 날이다.

    춘천은 의암 류인석을 비롯해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1860~1935) 여사를 배출한 의병 대표 도시다. 윤 여사는 16세에 춘천으로 시집와 살던 중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전국에서 항일 구국운동이 전개됐을 당시 시아버지 류홍석이 의병대장으로 나서자, 그를 따라 의병에 뛰어들었다. 윤 여사는 직접 군사 훈련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안사람 의병가’ ‘병정의 노래’ 등을 지어 불렀다.

     

    춘천 의병아리랑을 발굴한 이유라 명창. (사진=강원소리진흥회)
    춘천 의병아리랑을 발굴한 이유라 명창. (사진=강원소리진흥회)

    “우리나라 의병들은 나라 찾기 힘쓰는데 우리들은 무얼갈까. 의병들을 도와주세. 내 집 없는 의병들을 뒷바라질 하여 보세. 의복버선 손질하여 만져주세. 우리 조선 아낙네들 나라 없이 어이 살며 힘을 보아 도와주세…” 

    윤희순 여사가 지어 불렀다는 ‘안사람 의병가’ 가사 일부다.

    이 같이 자칫하면 사라지고 없을 무형의 문화유산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국악인들 있다. 강원소리와 춘천 의병아리랑이 울려퍼질 수 있게 된 것은 소리를 발굴하고 지켜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이들 덕분이다. 실체 없이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던 노랫말을 ‘춘천 의병아리랑’로 명명하고 듣고 부를 수 있게 발굴한 강원소리진흥회 이사장이자 춘천국악원장인 이유라 명창을 의병의 날을 앞두고 만났다.

    이유라 명창은 초등학교 시절 한국무용을 접한 후 18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소리에 입문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인 안비취 선생에게 20여년간 소리를 전수 받았다.

    서울 태생인 이 명창이 춘천에 자리잡게 된 것은 안 선생의 영향이 컸다. 춘천에서 민요를 가르칠 사람으로 이 명창을 지목했기 때문이다. 이 명창은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당시 수년째 열의를 태우다 지난 2000년에는 본격적으로 춘천에 자리를 잡고 사단법인 강원소리진흥회를 설립, 다음해 인가를 받아 강원소리를 찾기 위해 전념했다.

    ■“사실 강원도 소리를 발굴하기 위해 처음부터 각오를 했던 건 아니었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강원도에도 토속민요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잠재된 소리들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보물을 찾았다 싶었죠. 강원도에서 소리를 하게 된 김에 감춰져 있던 새로운 소리를 발굴한다면 이 또한 얼마나 큰 수확일까 생각했어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잖아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이 같은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요.”

    이 명창은 지난 2006년부터 강원도 전역을 다니며 강원소리를 찾아 다녔다. 소리를 찾는 과정에 동반됐던 것 중 하나는 기록으로 남겨두는 일이었다. 연세가 많은 지역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소리를 언제까지 들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명창은 어르신들과 막걸리를 나누며 어렵게 듣고, 기록해 온 소리를 공부한 결과물을 강원소리 1, 2, 3집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무대에 오른 이유라 명창. (사진=강원소리진흥회)
    무대에 오른 이유라 명창. (사진=강원소리진흥회)

    춘천 의병아리랑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명창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를 ‘의병아리랑’이라고 고증해줬던 故 박민일 강원대 교수의 역할도 적지 않다. 박 교수는 강원민요집에 실려있던 가사를 노래로 만든 것을 두고 곡의 가사가 ‘의병아리랑’이라고 고증했다. 그때부터 ‘춘천 아라리’는 ‘춘천 의병아리랑’으로 명명되며 가락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박 교수는 강원소리 제1집 음반 출시 기념 악보집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 축사를 통해 다시 한 번 춘천 의병아리랑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춘천 의병아리랑’은 1896년 춘천의병의 벌업산(보납산) 전투 때 생성된 성익현 의병장 관련의 진중가적인 현장민요다. 100여년간 가사만 전해져 왔을 뿐 가락을 몰라 박제된 소리로서 존재했지만, 이유라 명창이 그 소리 가락을 찾아내 직접 부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명창은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동안 소리에 열정을 바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로 ‘전주세계소리축제’를 꼽았다. 지난 2001년 10월부터 매년 열리고 있는 소리축제에서는 20여개국의 전통 민속음악과 현대음악이 어우러지는 축제로 전야제를 제외하고 메인 행사만 일주일동안 열린다. 강원소리를 세계적인 무대를 통해 알릴 수 있었던 초석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이 명창은 “1회 때부터 강원소리로 일주일간 장기공연을 펼쳤으며, 그 당시 지역신문 1면 톱기사로 소개되기도 했다”며 “이후에도 매년 초청받아 공연을 했으며, 소품을 들고 춤을 추면서 노래를 하니까 다들 재밌어하고 좋아했다”고 회고했다.

    민요하면 ‘경기민요’를 떠올리지만 그 당시 상황에서 강원소리는 이 명창의 노력 덕분에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으며 전해져오고 있다. 이 명창이 발굴한 춘천 의병아리랑은 그의 제자들이 부르며 오늘날까지도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의병의 날을 앞두고 기자가 만난 이 명창은 “춘천이 의병의 고장으로 의병마을 등 유형의 콘텐츠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특히 무형의 콘텐츠가 잘 보존되고 발전되기 위해서는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뿌리가 계속 뻗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명창은 한 시절이 지나면 사라지기 쉬운 무형의 유산을 잘 보존해야 한다고 거듭 밝히며, 강원소리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으면 한다는 바람도 드러냈다. 또 춘천 의병아리랑은 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가능성이 충분한 콘텐츠라고 설명했다. 

    [신초롱 기자 rong@m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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