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차가운 가슴, 미지근한 머리
  • 스크롤 이동 상태바

    [하창수의 딴생각] 차가운 가슴, 미지근한 머리

    • 입력 2021.04.11 00:00
    • 수정 2021.04.13 00:06
    • 기자명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몇 년 전,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명단이 언론에 오르내릴 즈음, 두 가지 질문이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하나는 사상검증이라도 하듯 “작가님은 당연히 블랙리스트에 들어 있겠죠?”였고, 다른 하나는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는 걸 확인한 사람들이 던지는 “작가님 이름이 왜 없지요?”라는 질책성 질문이었다. 처음 몇 번은 문학단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둥 구구절절 이유를 달고 내 정치적 성향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까지 대답을 했지만, 구차와 민망을 넘어 자괴감까지 들기 시작하자 곧바로 포기했다. 그래서 이후론 그저 ‘의문의 1패’를 당한 자의 씁쓸한 미소와 함께 짧게 답했을 뿐이다. 첫 번째 질문에는 “아뇨,” 두 번째 질문에는 “글쎄요.”

    정치나 선거와 관련된 얘기가 나올 때면 내가 자주 거론하는 것이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가이며 예일대 교수인 로버트 라이드-파의 《Black Gay Man》이다. ‘흑인 남자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표제가 말해주듯, 미국에서 가장 살아가기 힘든 부류에 속하는 “흑인이면서 남자인 동성애자”를 통해 미국 사회와 정치의 본질을 파헤치는 책이다. 이 책에서 특히 내가 즐겨 인용하는 구절은, 서문을 쓴 미국의 문학평론가 새뮤얼 딜러니가 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노동자 계급에 속하는 유권자들이 왜 그들을 가장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본계급의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보수적 정치태도를 보이는 걸까?”라는 질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정치와 사회를 얘기할 때도, 무엇보다 선거와 관련시켰을 때 똑같이 던질 수 있다.

    내가 맨 처음 선거권을 가진 것은 막 스무 살이 된 1980년이었다. 그때 마침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내 표가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1도 없는’ 선거였다.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치러진 이른바 ‘체육관 선거’였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아마도 거의 100%에 가까운 표가 전두환에게 던져졌을 것이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추악한 부정선거장에서 내가 한 짓은 후보자 모두에게 빨간 도장을 찍는 거였다. 한 표라도 부정하게 사용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현실이 아니었다.

    내가 던진 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일조하는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18년이란 시간이 지나야 했다. 하지만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15대 대선(1998) 이후, 내 표는 번번이 낙선한 후보에게로 돌아갔다. 이유는 자명했다. 대선이든 국회의원선거든 내가 지지한 후보는 득표율 4%대가 최대치인 진보정당의 후보였다. 마지막까지 ‘대안투표’를 고민했지만, 그때마다 내 머리를 얼음처럼 차갑게 만들고 가슴을 뜨겁게 달군 것은 로버트 라이드-파의 책, 거기에 던져진 새뮤얼 딜러니의 질문이었다. 우리는 왜 우리를 억압하는 계급의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걸까? 이 보수적인 정치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몹시 서글픈 우화 하나를 얘기하겠다. 처음으로 진보정당의 후보(권영길)가 대통령에 도전한 16대 대선, 보수정당 후보로 이회창과 노무현이 나선 때였다. 직전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던 이회창은 재도전이었다. 당시 소설가들이 꽤 많이 드나드는 사이트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를 두고 설전이 벌어졌는데, 사실 ‘설전’이랄 것도 없이 “노무현이 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그때 나는 거금 5만 원을 걸고 내기를 제안했다. “권영길이 당선된다. 지난 대선 때 김대중이 1천만 표 정도를 받았는데, 그때는 지금처럼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없었다. 우리나라엔 지금 비정규 노동자가 8백만 명을 상회하고, 모두가 유권자다. 그 가족들까지 합친다면 1천 만 표를 넘기는 건 당연지사.” 내 글에 달린 댓글에는 웃음 이모티콘이 난무했다. 내 가슴을 가장 아프게 만든 댓글은 “그대의 꿈이 이루어지려면 백만 년은 걸린다”는 것이었는데, 갸륵하게도 나는 개표가 시작되기 전까지 ‘백만 년 뒤에나 실현가능할’ 꿈에 젖어있었다.

    며칠 전 두 거대도시의 시장을 뽑는 보궐선거가 끝났다. 내가 사는 곳과는 상관이 없는 선거였지만, 결과를 바라보는 마음까지 상관없지는 않다. 유권자들의 보수적 정치태도는 여전하다. 여전함을 넘어 더 공고해졌다. “무능보다는 부패를 택했다”는 어느 정치평론가의 언설은 고약하지만, 그 고약함은 해방 이후 70년을 이어온 우리의 현대정치사를 관통한다. 아프고, 부끄럽고, 슬프다. 개인적인 감정임을 전제한다. 이렇게 전제하면, 묻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다. 선거 때만 높여질 뿐 평소엔 ‘개와 돼지’로 취급되는 국민, 나도 당연히 포함되는 그 국민이라는 존재의 가슴은 정말로 따뜻 한가? 그리고 그 머리는 과연 냉철한가?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