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마음풍경] 봄의 정령이 우리를 불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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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의 마음풍경] 봄의 정령이 우리를 불러요

    • 입력 2021.03.21 00:00
    • 수정 2021.03.22 16:42
    • 기자명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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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벌써 온 세상이 꽃들의 잔치다. 내가 일하는 김유정문학촌 주변에 금병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등산로도 있지만, 마을 안길을 짧게 한 바퀴 도는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다. 볕이 좋은 날 그곳에 나가 한 시간쯤 걸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구두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을 때 이미 마음은 숲속으로 가 있다. 걸음은 저절로 가볍고 기운차다. 

    벌써 꽃이 핀 나무도 있고 준비하는 나무도 있다. 아직 작은 키에 정원수처럼 자란 매화나무는 마치 내 눈높이에 걸린 연한 구름 같다.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은 더욱 푸르다. 꿈을 꾸듯 저 꽃들과 함께 한 어린 시절의 일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지금 이 철에는 무얼 했더라, 하고 떠올려 보니 김소월의 시 속에 나오는 영변 약산의 진달래처럼 우리집 뒷산과 앞산에도 불이 붙듯 진달래가 한 가득이었다.

    그 사이에 또 가지마다 노란 꽃을 피우고 있는 나무가 있다. 우리 김유정문학촌에도 문학촌의 상징처럼 아주 많이 심어져 있는 생강나무다. 꽃에서 알싸한 생강 냄새가 난다고 해서 꽃 이름도 그렇게 붙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생강나무인 것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어릴 때는 ‘동박나무’ 혹은 ‘동백나무’라고 불렀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바로 그 노란 꽃이다. 남쪽 지방에서 아주 이른 봄에 피어나 절정기에 눈물처럼 뚝 떨어지는 붉은 동백꽃이 아니라, 산수유꽃을 닮은 노란 동백꽃이다. 

    그 꽃은 어릴 때 진달래와 함께 산에서 제일 먼저 꺾어오는 꽃이다. 산골 집안에 마땅한 꽃병이 있을 수 없다. 뒤란(뒤뜰의 방언) 물 흐르는 곳에 줄을 맞추듯 꽃아두고, 동네 가게에서 하나 간신히 얻어온 소주병에도 한가득 꽂아 책상 위에 둔다. 병이 없으면 일부러 그런 병 하나를 구하기 위해 형제가 함께 멀리 시내까지 나갔다가 올 때도 있었다. 

    그런 추억들도 집 안에 있을 때나 사무실에 있을 때는 떠오르지 않고, 바깥으로 나와 들길을 걸을 때라야 떠오른다. 그래, 봄이면 그랬지. 지금 이 철이면 논마다 미리 모내기를 준비하여 물을 받아들이고, 군데군데 허물어진 논둑을 손보는 가래질을 했다. 논물이 가두어지면 그 위에 바람 한 번 불 때마다 매화꽃이 날아오고, 그 뒤를 이어 매화꽃과 모양도 빛깔도 비슷한 살구꽃이 날아와 작은 꽃물결을 이루곤 했다.

    집 안에 있으면 들리지 않지만, 들길을 나서면 꽃이 피고 잎이 나오는 소리까지 들린다. 지금이 바로 시작이다. 이제 비 한번 내릴 때마다 기온이 쑥쑥 올라가면서 아직 터지지 않은 꽃들이 더 큰 소리를 내며 펑펑 터지고, 잎도 우리 귀엔 들리지 않지만 저마다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쑥쑥 나올 것이다. 하루 자고 일어날 때마다 세상 풍경은 더 환해진다. 봄꽃들이 순서를 다투어 피어나고, 나뭇가지에 새들까지 날아와 꽃과 함께 지저귄다. 그러면 내 귀는 또 그게 어린 날 우리 집 마당가에 와서 요란스러 울던 직박구리나 철도 모르고 일찍 날아온 검은등뻐꾸기 소리가 아닌가 싶어 자꾸 여기저기 둘러보게 된다.

    그런 추억 속에 이 무렵 어른들이 자주 하시던 말씀도 떠오른다. “제비 한 마리 봤다고 옷 벗어던지지 마라” “나비 한 마리 봤다고 솜바지 벗지 마라” 어쩌면 말씀들도 그렇게 재미나게 하실까. 어떤 일의 성급함을 경계하는 말이지만, 어쩌면 제비 한 마리, 나비 한 마리가 갖는 봄의 상징성일 수도 있겠다. 온 들에 흔하고 흔한 꽃다지, 쌀알이 으깨진 모습의 냉이꽃도 양지쪽의 성급한 것들은 벌써 꽃대를 내밀고 있을 것이다. 밖에 나서면 그런 작은 꽃들도 저절로 눈에 들어온다. 이 숲과 들에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지만 밖에 나서지 않으면 절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자연 속으로 나가야만 함께 할 수 있는 봄의 향연이다. 봄의 산책은 그냥 소풍이 아니다. 봄과 내가 자연 속에 하나로 어우러지는 축제와도 같다. 사철 똑같은 색처럼 느껴지는 소나무의 모습도 물이 올라 한결 더 푸르다.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금강소나무의 자태가 가장 의연하게 느껴지는 것도 지금처럼 봄기운을 받았을 때이다. 저들도 곧 새순을 내밀고 송홧가루를 피우고, 때맞춰 바람이 불면 농부가 가래질해놓은 논 위에 금가루를 뿌릴 것이다.

    바야흐로 봄이다. 그러나 아무리 옆에 와서 아우성치듯 부르면 무얼 하나. 문을 열지 않으면 저 빛나는 봄이 나의 봄이 아니라 창밖의 봄이 되고 말듯 밖으로 나서지 않으면 자연 속의 어떤 풍경도 내 것이 아니다. 산과 들에 나가 직접 보면 더 예쁜 봄의 정령들이 지금 우리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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